[창] 버려진 옷의 행방

박상은 2023. 7. 1.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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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은 사회부 기자


지난 5월 미국 위성영상 플랫폼 ‘스카이파이’가 위성사진 한 장을 공개했다. 칠레 북부 이키케 인근에 있는 아타카마 사막을 촬영한 이미지였다.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인 아타카마 사막은 황토색 모래와 암석으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사진 한켠에 이질적인 회색 형체가 포착됐다. 크기는 가까운 마을과 비슷했고, 이끼처럼 땅을 뒤덮고 있었다. ‘거대한 헌 옷 더미(Giant Pile of Used Clothes)’. 스카이파이는 해당 지역에 동그라미를 표시한 뒤 이렇게 적었다. 버려진 옷가지가 쌓이고 쌓여 우주에서도 보이는 쓰레기 산을 만들어낸 것이다.

칠레는 남미 최대의 중고 의류 수입국이다. 면세 지역(자유무역지대)인 이키케 항구를 통해 유럽, 아시아, 미국 등에서 팔리지 않은 중고 의류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온 상인들이 일부를 구입하고, 일부는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보내져 재판매된다. 상품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남은 의류들은 사막에 버려지는데, 이런 옷이 수입되는 물량의 절반을 넘는다. 수치로 따지면 매년 최소 3만9000t의 옷이 사막에 쌓인다고 한다. 여름 티셔츠부터 겨울 점퍼까지 종류도 색깔도 다양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가격표가 그대로 남아 있는 제품도 상당수라는 점이다.

의류나 신발 같은 패션 아이템은 재활용이 어려운 대표적인 품목들이다. 단추나 지퍼 같은 부자재가 복잡한 형태로 붙어 있고, 원단에도 다양한 섬유가 혼재돼 있어 재질별로 분류하는 작업이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대부분의 옷은 태어나는 시점부터 ‘쓰레기’로 직진하는 슬픈 운명을 가졌다.

폴리에스테르, 나일론, 아크릴 같은 합성섬유는 석탄이나 석유를 원료로 한 화학제품이라 보통의 플라스틱처럼 자연 분해되는 데 수백년이 걸린다. 세탁 과정에서 떨어져나오는 미세플라스틱은 덤이다. 이런 의류들이 사막에 방치되면 열기에 녹으면서 독성 가스를 내뿜는다. 옷에서 나온 유해물질은 이키케 지역의 대기는 물론 지하수까지 오염시키고 있다. 피해를 줄이려면 옷더미를 태워 없애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방출되는 유해가스의 양도 어마어마하다.

칠레가 처한 현실은 충격적이긴 하지만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최근 가나의 중고 의류 시장 상인들은 유럽연합(EU) 본부를 찾아가 EU에서 가나로 들어오는 의류 폐기물의 처리비용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서구에서 밀려 들어오는 헌 옷이 ‘환경적 재앙’이 됐기 때문이다.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는 1960년대부터 서구에서 들어오는 헌 옷을 되팔아 생계를 꾸리는 칸타만토 시장이 있다. 세계 최대 중고 의류 시장 중 하나로 꼽히는 이곳에는 매주 1500만개에 이르는 헌 옷이 도착한다. 당연히 모든 옷이 상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40% 정도는 쓰레기로 분류돼 하루 100t 정도의 옷이 버려진다고 한다. 제대로 폐기되지 않은 옷들은 거리에, 강가에, 해변에 쌓인다. 얽히고설킨 옷가지가 바닷가를 뒤덮은 모습은 우리가 잊고 있던 현실이자 그들의 일상이다.

세계 섬유 생산량은 2000년 5800만t에서 2021년 1억1300만t으로 2배 가까이 늘었다. 저렴한 가격으로 낮은 품질의 옷을 대량생산하는 패스트패션 산업이 성행한 결과다. 패스트패션 브랜드는 유행을 반영한다는 명목으로 1~2주 간격으로 새 제품을 찍어낸다. 회전율이 빨라야 돈이 되기 때문에 재고는 폐기하고 가격은 낮춘다. 물론 소비자의 인식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패션 업계에서 ‘지속가능성’이 화두로 떠오른 건 그만큼 환경을 생각하는 소비자들이 많아지고 있어서다.

한국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중고 의류를 많이 수출하는 나라다. 우리나라에서 분리배출된 헌 옷의 양은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연간 5만~6만t 규모를 유지하다가 2020년 8만2000t, 2021년 11만8000t으로 폭증했다. 폐의류 대부분은 동남아나 아프리카로 보내진다. 지난해 칠레에 1만4000t, 가나에는 3500t의 중고 의류를 수출했다.

아무리 ‘기부’나 ‘중고 거래’ 같은 말로 포장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 양말 하나, 티셔츠 한 장을 구입하는 그 사소한 선택 또한 마찬가지다.

박상은 사회부 기자 pse0212@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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