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2년차 축구인, 낯선 여성이 말을 겁니다 [언젠가 축구왕]

이지은 2023. 6. 30. 21:0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피드백 좀 주세요" 축구교실 신입 여성들에게 과거의 나를 본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공을 만져본 일 없던 여성이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축구하면서 접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함께하면 이렇게 따뜻하고 재밌다고, 당신도 같이 하자고요. <기자말>

[이지은 기자]

지금의 축구팀과 코치님은 내게 충분히 완벽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공을 차는 것으로는 실력을 쌓기에 한없이 부족하다.

"아, 성장하고 싶다. 강해지고 싶다!"

이런 말을 하면 주변 사람들이 "조기축구 아저씨들도 일주일에 한 번 하던데?"라고 묻는데, 그건 중학생 때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줄곧 축구를 놓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이제 1년 6개월 된 나로서는 사정이 다르다.

축구교실에 가봤지만

'축구에 진심이라면서 어떻게 일주일에 한 번만 차요? 축구하지 않는 하루하루가 너무너무 아까워!' 심정인 것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빨리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큰 친구 연지와 이에 대한 고민을 나누다가 의기투합하기로 했다.

"우리 축구교실이라도 알아볼까?"

그렇게 축구교실을 전전하기 시작한 지 한 달째. 아직도 우리에게 적당한 곳을 만나지 못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 실력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초보도 아니고 수준급도 아닌 상태. 남자들이야 수요가 많은 만큼 팀 스펙트럼도 다양하고 축구 수업도 수준별로 천차만별일 테지만, 여자들은 '초보반'이 대부분이다. 우리처럼 어중간하게 걸쳐 있는 수준을 받아줄 만한 수업을 찾기는 쉽지 않다.
 
 친구들의 풋살화
ⓒ 오정훈
한번은 집 근처 축구교실에 갔는데, 기존 팀에서는 몸 풀기의 일종인 사다리 스텝 훈련을 기초부터 알려주고 있었다. 연지와 나는 팀 내에서도 사다리를 잘 타는 편이라 '사다리 주장'과 '부주장'으로 임명된 바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사다리 두어 바퀴를 돌고 와도 아직 첫 단계를 배우고 있는 이들과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까. 결국 하루 체험 코스를 끝으로 발길을 끊었다.

한 달간의 축구교실 투어 끝에 느낀 점이 하나 있다. 어떻게 차야 공이 앞으로 뻗어 나가는지조차 모르던 내가 이제는 어느덧 '어떻게 하면 저 사람처럼 될 수 있을까?' 생각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 친구는 쉬는 시간에 내게 다가오더니 "저 아까 경기할 때 고칠 점 없었나요? 피드백 좀 주세요"라고 묻기도 했다. "저도 배우는 사람이라 잘 모르는데요? 남에게 피드백 드릴 수준이 아닌데요?"라고 손사래 쳤다가도 문득 마음을 고쳐 먹고 아는 선에서 최대한 조언해주었다.

내가 그에게 피드백을 건넨다고 해서 그의 실력이 한번에 개선된다거나 드라마틱한 반전이 일어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또 당연히 내 피드백으로 고마워하던 그가 나에게 금전적인 이익이나 애정을 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낯모르는 신입 여성에게 차마 모질어지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다. 그의 눈빛에서 과거의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형형색색 조끼 나눠 입고 시합 중.
ⓒ 오정훈
축구 초보들을 보며 나를 떠올린다

축구를 취미로 삼은 지 1년 반, 어느덧 어엿한 2년차 축구인이 되었다. 처음에 들어간 팀은 내가 느끼기에 실력의 벽이 너무나도 높았다. 다른 이들은 공을 찬 지 만 1년이 넘었고, 나는 인사이드와 아웃사이드의 차이도 잘 모르던 상태. 초보자에게 1년은 말도 못하게 거대하다. 내가 뭐 하나라도 비슷하게 흉내내면 "나이스, 나이스" 외쳐주는 친구들의 외침이, 내가 정말 잘해서가 아닌 일종의 추임새임을 모르지 않았다.

인생의 모토 중에 하나가 '남에게 폐 끼치지 말자'인 내게 '민폐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축구 인생은 도통 적응되지 않았다. 팀에 가입한 지 2개월차, 한번 내린 결정을 쉽게 번복하지 않는 나로서는 큰 결심을 했다. 팀의 걸림돌이 되지 말고 그냥 내 그릇에 맞는 곳을 찾아 나서자. 주장 황소에게 독대를 신청한 뒤에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나를 가만히 앉혀놓고 이야기했다.

"언니, '행복 축구(즐기는 수준에서 하는 축구)'는 다른 데에서도 할 수 있잖아. 우리랑은 진짜 축구를 하자. 내가 도와줄게."

나는 누군가 '당신이 필요해요'라고 말하면 지나가는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며 길을 걷는 브레이트 시인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축구 친구가 나를 붙잡아주니 차마 그 자리에서 돌아설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붙잡는 손길은 그가 아닌 나를 위한 것임을 너무 잘 아니까. 가장 못하는 친구가 나간 자리를 더 잘하는 이가 메꾸는 편이 팀 전력에 훨씬 도움 될 텐데, 그러지 말고 소속감 가지고 함께하자는 이유는 단 하나, 나를 같은 팀 팀원으로 생각해주기 때문이었다.
   
 시합 중인 친구들.
ⓒ 오정훈
언젠가 황소는 마포에 있는 야외 풋살장 하나를 빌려 나와 1대 1 훈련을 함께해준 적이 있다. 그 영상을 지금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인데, 그때 그는 화 한 번 안 내고 찬찬히 자신이 아는 한도에서 피드백을 건네주었다. 당시에 못하던 기술들을 지금 습득할 수 있게 된 것은 시간과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황소를 비롯한 축구 친구들의 정성 어린 조언들이 자양분으로 쌓였기 때문이다.

언젠가 황소는 인스타그램에 돌아다니는 성공 법칙을 담은 이미지 하나를 내게 보냈다. 제목은 "성공은 실패를 버틴 사람에게 온다." 우리 상상 속 성공의 모습은 노력과 시간이 100퍼센트 반영되어 성공 쪽으로 45도 직선 우상향하는 그래프이지만 실제로는 노력+실패+끈기가 모이는 한없이 꼬인 실 같은 어질어질한 형태의 우상향 그래프라는 내용이었다.

후자의 그래프는 꼬임이 심한 롤러코스터처럼 바닥을 쳤다가 공중에서 휘몰아쳤다가 한바탕 난리가 난다. 그 좌충우돌 대소동을 거치고 나면 나는 어느 순간 몇 계단 위쪽에 올라타 있는 것이다.

당시의 나는 노래 가사처럼 "(축구)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를 외치던 때라 그 그래프를 보며 '난 계단을 오른 적 자체가 없는 레벨 0인데'라고 생각했지만 차마 황소에게 그렇게 말하진 못했다. 그저 "알았어. 지난하게 노력해보자"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기본기 연습 중
ⓒ 오정훈
그렇게 바닥을 쳤던 이지은은 축구 친구이자 선배들의 정성 어린 피드백을 받아안은 덕분에 무사히 2년차 축구인으로 거듭났다. 그러니 "피드백 좀 주실 수 있나요?"라고 묻는 축구 초보들에게서 나를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1년 반 전의 나의 환생이다.

그날 나는 황소의 마음에 빙의되어 최선을 다해 내가 아는 지식들을 그에게 건네었다. 나와 황소의 관계와 달리 그와 나는 다시 만날 수 없을 확률이 높겠지만, 축구인이라는 큰 바운더리 아래 공을 차는 초보 여성이라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앞날을 응원할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