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 노래" 150분간 귀가 황홀해지는 영화
[김형욱 기자]
▲ 영화 <엔니오> 포스터. |
ⓒ 영화사 진진 |
언제부터인지 머릿속에 남아 떠나지 않고 떠도는 노래가 있다. 선율이라고 하는 게 맞을까? 영국의 팝페라 가수 사라 브라이트만이 부른 <넬라 판타지아>다. 첫 소절 '넬라 판타지아~'는 영원히 내 안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이 노래는 사라가 원곡자에게 가사를 붙여 성악곡으로 만들자고 했다가 거절 당한 후 오랫동안 설득해 허락을 얻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원곡자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넬라 판타지아>의 원곡은 영화 <미션>에서 가브리엘 신부가 원주민들 앞에서 부른 '가브리엘의 오보에'다. 그리고 이 곡은 '엔니오 모리코네'가 만들었다. 현대 영화 음악의 시조새이자 거장으로 칭송받는 그분. 영화는 잘 몰라도 그의 영화 음악은 잘 알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테다. 우리 시대 대중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으니 말이다.
엔니오는 2020년에 타개했는데 직전에 다큐멘터리 영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를 찍었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 작업하며 <시네마 천국> <피아니스트의 전설> <말레나> <베스트 오퍼> 등을 협업한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엔니오는 주세페가 아니면 다큐를 찍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함께하며 쌓인 서로를 향한 절대적인 신뢰가 느껴진다.
▲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의 한 장면. |
ⓒ 영화사 진진 |
엔니오는 이탈리아 태생이다.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트럼펫 연주자였던 아버지의 강압에 어릴 적부터 트럼펫을 배워야 했다. 일찍이 음악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트럼펫을 배웠는데, 지휘와 작곡으로 월담을 시도했다. 처음엔 눈에 띄지 않았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트럼펫 전공으로 음악원을 졸업하지만, 작곡으로 재입학한다. 20세기 현대 음악의 거장 고프레도 페트라시의 지도를 받는다.
작곡으로 음악원을 졸업한 엔니오, 마리아 트라비아를 만나 결혼한다. 녹록지 않은 현실에 좌절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유명 음반사 RCA에 들어가 유명 대중 음악을 편곡하기 시작한다. 가족을 먹여 살리고자 시작한 일이거니와 순수 음악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기에, 동료 작곡가들에게 숨기고자 가명으로 활동했다. 그렇게 1950~1960년대 수백 곡을 편곡하며 수많은 히트곡을 배출해 유명해진다.
엔니오가 본격적으로 영화 음악에 발을 디디기 전까지의 음악 활동은 굳이 찾아보지 않는 이상 알기가 힘들다. 그가 트럼펫 전공자였고 작곡으로 선회해 위대한 작곡가에게 사사했으며 수백 곡에 달하는 대중 음악을 편곡해 크게 히트 쳤다니 말이다. 세계적인 거장도 커리어 초기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구나 싶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영화 음악 작업들
엔니오는 1961년 루치아노 살체 감독의 <파시스트>로 영화 음악을 시작했다. 정확히는 '엔니오 모리코네'라는 본명을 크레딧에 올린 최초의 영화다. 이후 1964년 그 유명한 <황야의 무법자>로 이름을 알리는데, 세르조 레오네 감독과는 어린 시절 같은 학교를 다녔다. 어른이 되어 협업을 시작하며 서로 알아본 이후 죽마고우가 되었다. 그들은 <석양의 건맨> <석양의 무법자> 등 서부극을 몇 편 더 협업한 후, 1984년 세르조 감독 최후의 걸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까지 함께한다. 그야말로 영혼의 단짝.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비록 엔니오에게 아카데미를 안겨주진 못했지만(아카데미 역사에 남을 오판 중 하나로 기억된다), 그의 순수 음악 동료 작곡가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중 한 명은 공개 사과 자필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엔니오 개인적으로도 영화 음악계로서도 변곡점이 된 영화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로도 오랫동안 아카데미는 그를 외면했다.
1980년 이후 엔니오는 영화보다 더 유명한 OST를 만들었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언터처블>,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 천국> <피아니스트의 전설> 등이다. 모두 아카데미에서 외면당했다. 그러다가 2007년에 이르러서야 제7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명예 오스카상을 수상했고, 2015년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쿠엔틴 타란티노의 <헤이트풀 8>으로 음악상을 수상하며 오랜 숙원을 풀 수 있었다.
▲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의 한 장면. |
ⓒ 영화사 진진 |
지금 우리에겐 엔니오 모리코네보다 더 익숙한 영화 음악을 작곡한 이들이 있다. <스타워즈> <인디아나 존스> <쥬라기 공원> <해리 포터> 등 1970~2000년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시리즈들의 OST와 메인 테마를 작곡한 존 윌리엄스, <라이온 킹> <캐리비안의 해적> <다크 나이트> <쿵푸팬더> <듄> 등 1990~2020년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흥행작들의 영화 음악을 맡은 한스 짐머. 이밖에도 제리 골드스미스, 존 배리, 하워드 쇼어, 제임스 호너, 사카모토 류이치, 히사이시 조 등이 있다.
그런 와중에도 엔니오를 영화 음악 역사상 이견 없는 최고의 작곡가로 치켜세우는 건 이유가 있다. 이 다큐로 알 수 있는 건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걸 추구하는 실험 정신, 쉬지 않고 몰두해 작품을 내놓는 꾸준함, 감독과의 갈등도 불사하는 자기 확신 등이다. 무엇보다 그는 순수 음악 작곡가 출신으로 평생 영화 음악을 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음악을 한자리에서 몰아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황홀했다. 미처 몰랐던 사실, 이를테면 부끄럽지만 그가 1960년대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들 다수의 영화 음악을 맡은 걸 알게 되어 고마웠다. 장장 150분 넘게 대가들이 나와 엔니오를 찬양하다시피해 후반 30분은 지루했지만, 엔니오가 의외로 재밌는 구석이 있어 괜찮았다. 무엇보다 그의 인생 이야기에서 많은 걸 배웠다. 앞으로의 인생이 생각보다 재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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