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농민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유병덕 2023. 6. 30. 16:5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4%, 사라져가는 농민들... 그 존재 의미를 되새기자

[유병덕 기자]

농사를 작게 짓는 소농(小農)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외할머니댁에 놀러 갔을 때 보았던 그 작은 밭들, 다양한 작물들, 손자가 손을 보태면 능률이 올라 생각보다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와 시원한 등목을 할 수 있었던 농사를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손자는 그렇게 경험한 노동이 적당한 어려움으로 보였을 것이고, 자연과 협업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가는 지혜롭고 따뜻한 현인(賢人)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소비자는 이러한 소농과 직거래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농부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내가 먹는 음식이 믿을만한 출처에서 왔음에 안심하면서, 어려운 소농을 도왔다는 소박한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사실 그렇게 구입하면 마트보다 가격도 더 싸게 사는 경우가 많아 여러모로 만족하게 됩니다.

그런데, 소비자가 그렇게 먹을거리를 구할 기회가 흔치 않기 때문에 직거래는 아주 조금만 하고 대부분은 마트에 가서 장을 보거나 인터넷으로 배달을 주문하고 있지요. 농부가 누구인지 모르고, 환경・보건・사회적으로 안심하는 마음은 먹을거리를 유통하는 브랜드에 맡겨두고, 소농의 어려움은 잊고 지내는 것이지요.

마음속 동경과 달리 지금 사회의 유통구조는 소농과 공존을 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래 물량과 품질을 관리하기 어렵다고 소농을 등지고 싶어합니다. 외갓집을 그리워하는 그분도 유통 브랜드의 마케팅을 더 신뢰하고 이용하기 편리한 대기업 마트로 발길을 주기 마련이죠.

이러다가 농민은 그만 사라질 것같습니다. 농업과 농촌이 사라질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농촌의 빈공간을 어떻게든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 개발자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니까요. 로봇이 농사를 짓겠지요. 혹은 농업노동자를 고용하여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기업들이 빈자리를 메우겠지요. 하지만 농민은 사라질 것 같습니다.

농민이란 자연과 협업을 통해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농업 생산자로서 농민은 점차 인구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한때 인구의 40%를 차지했던 농민은 이제 4%를 조금 넘는 수준입니다. 우리 사회는 농민이 없는 농업을 위하여 오늘도 정책과 예산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농민은 그만 사라질 것 같습니다.

자신이 속한 계층이 도태의 과정을 밟고 있다면 누가 행복할 수 있을까요? 살려달라고 외쳐도 이제는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제 외갓집이 서울에 있거나, 촌에 혼자 사시는 외할머니는 땅을 젊은 농업경영자에게 임대하고 말았거든요. 외할머니를 찾아가면 자동차를 타고 맛집이나 명승지를 구경가는 것이 일이 되어, 자연과 협업하는 노동을 맛볼 기회는 거의 사라졌거든요. 자신의 경제생활에서 자부심을 느낄 기회가 사라지는 만큼 농민 계층의 지속가능성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농민은 대부분 소농입니다. 그들은 자연과 협업할 줄 압니다. 농업생태계(Agroecosystem)를 가꾸어 더 높은 생산성을 유지하고, 기후변화에 대응하며, 자원을 지속가능하게 유지할 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농업생태학(Agroecology)이란 어려운 말을 모르지만, 농민으로서 삶 자체가 농업생태학의 실천입니다. 

하지만, 농민은 기업과 브랜드에 예속되어 씨앗, 퇴비, 도구, 가공, 판매 등 자신의 노동을 제외한 모든 것이 농민 본연의 삶에서 벗어난 형편입니다. 오직 브랜드에 예속된 노동만 남아있죠. 자연과 협업을 추구하기 보다는 생산성이 높은 시설을 들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소를 키워도 수십 마리 이상을 키워야 하고, 논에 벼를 키워도 수만 평 이상을 키워야 도시 중산층의 꽁무니를 따라갈 만큼 벌 수 있습니다. 비가 와도 겨울이 와도 농사를 짓고 있어야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농민이 어떻게 웃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농민으로서 삶을 되찾을 수 있도록 사회가 도와야 하는 것이지요. 농업과 농촌에 농민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서로 상기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사실 농업과 농촌보다 농민을 작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첫 번째 예로, 친환경농사를 짓는 농민보다 환경의 가치를 먼저 말합니다. 심지어, 아직도 식품안전의 가치만을 생각하는 소비자들도 많습니다. 친환경농사의 가치를 식품안전이나 환경보전에 두다보니, 농민의 가치를 잊고 있는 듯합니다.

친환경농산물에서 잔류농약 불검출이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 농민을 쥐어짜는 제도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틀렸다는 인식을 하는 사람을 거의 찾기가 어렵습니다. 친환경농사를 짓는 농민이 먼저 있어야 다른 가치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 모두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예로, 농촌경관(Landscape)에서 농민의 생활을 중심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자연과 협업하는 '농민농업'은 농민이 주체가 될수 밖에 없는데 그들의 삶을 조명하지 않습니다. 선량한 인간의 모습으로 촬영하는 대상으로는 보고 있지만, 농민은 가장 '도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과학적이고, '공간을 창조적으로 운용하는' 건축적이고, '자연과 협업하는' 생태학적이고, '비용-효율의' 경제적이고, '협동하고 돕는' 사회적이고, '자신의 경험을 전파하는' 교육적인 이들입니다. 

무엇보다 농민 자체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일깨우지 않으면 농민은 농업노동자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농촌경관은 구경하는 경치가 아니라 농민의 생활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농민의 지속가능한 삶을 되살려 인문학적 경관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세 번째 예로, 씨앗을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흔히 토종씨앗(또는 토종종자)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나 여러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고, 조례를 만든 시도・시군도 많습니다. 토종 복원은 누가 보아도 정당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지만 농민이 주체가 되어 이것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씨앗의 개념에 농민을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토종'은 과거 지향이고, 외갓집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농민은 과거의 종자로는 먹고살기 어려우니까요. 씨앗을 바라보는 마음에 농민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면 '토종종자'보다는 '농민종자'로 칭하는 것이 옳습니다. 현재의 농민에게 필요한 다양한 품종과 유통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씨앗에 관한 활동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농업을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많은 활동이 제도권의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는 농민을 중심에 두고 그런 활동을 하고 있을까요? 환경, 식품안전, 농촌경관, 토종복원의 문제에서 대부분 농민의 삶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농민이 배경이 되어 여러 가지 좋은 목적을 이루려고 하지만, 이제 다시 농민이 주인공이 되어 그러한 좋은 목적을 이루도록 농민 중심의 운동과 정책으로 전환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농민이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