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병' 인정을 위한 의사와 노동자들의 투쟁
[이준목 기자]
'사회와 단절된 병이란 없으며 몸은 사회를 반영한다.'
김승섭 교수의 <아픔의 길이 되려면>에 수록된 문장이다. 인간이 겪는 모든 질병은 결국 그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원인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질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몸을 낫게 하는 것을 넘어, 그 질병을 앓게 된 사회적 환경을 고쳐야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6월 29일 방송된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마을의 숨겨진 살인마-사라진 308명' 편을 통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산업재해중 하나로 꼽히는 '원진 레이온 참사'를 조명했다.
▲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한 장면. |
ⓒ SBS |
또한 1979년에는 역시 해당 지역에 위치해있던 한 공장에서 배수구 작업을 하려고 맨홀에 들어갔던 근로자 세 사람이 그대로 사망하는 섬뜩한 사고가 벌어졌다. 하지만 사고의 정확한 원인은 당시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한편 이들이 일하던 공장에는 당시 신입사원으로 갓 입사했던 김장수씨도 있었다. 다시 10년이 흐른 1989년, 김장수씨는 갑자기 얼굴과 팔다리가 점점 마비되고 감정표현을 제대로 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급히 병원을 찾았지만 가는 곳마다 '원인불명'이라는 판정을 받으며 병명도 치료법도 전혀 찾을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증상을 나타낸 환자는 놀랍게도 장수씨만이 아니었다.
당시 사당동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원을 운영하던 김록호 원장에게 언제부터인가 비슷한 이상 증상을 호소하는 다수의 환자들이 찾아온다. 이들은 바로 장수 씨를 비롯하여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던 동료들이었다. 김 원장은 이상함을 느꼈지만 그 역시 정확한 병명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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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원장은 서울대 의대 도서관을 찾아서 자료를 검색하다가 마침내 진실을 찾아냈다. 병명은 바로 이황화탄소(CS2) 중독이었다.
이황화탄소란 탄소의 황화물로서 무색의 휘발성 액체이며 원목을 녹이는데 사용하는 화학물질이었다. 또한 이황화탄소는 강한 맹독성을 가지고 있어서 인체에 노출될 시에는 급성-만성 중독을 통한 혼수상태, 신경계 장애, 자살충동 등을 유발할 수 있으며, 다량 노출될 경우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물질이었다.
그동안 남양주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고 피해자들과 김 원장을 찾은 환자들에게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장수씨가 근무하는 인견사(Rayon.레이온) 제조사, 바로 '원진 레이온'의 노동자였던 것. 의류의 원단으로 사용되는 인견사는 천연펄프를 화학작용을 통하여 실의 형태로 만드는 것이고, 그 재료를 녹이는데 사용되는 물질이 이황화탄소였다.
원진 레이온이 남양주에 공장을 처음 설립한 것은 1966년, 마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수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마을 주민이 단체로 쓰러졌던 것은 부식된 파이프로 인하여 공장의 독성가스들이 마을로 누출되어 벌어진 것이었고, 맨홀에 들어갔다가 변을 당한 세 근로자 역시 독성물질을 흡입하여 순식간에 사망까지 이른 것이다. 이밖에도 독성가스가 바람을 타고 인근까지 날아가며 마을의 오래된 나무들이 죽고, 철제로 만든 각종 도구와 시설까지 부식되는 등 공장이 들어선 이후 이상한 일들이 속출했다.
외부에서도 이 정도인데, 하물며 공장 안에서 근무내내 이황화탄소에 노출되어야 했던 노동자들의 환경은 더욱 끔찍했다. 하지만 정작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도 모른 채 일을 해야만 했다.
문제는 회사 측에서 이미 이런 사실을 알고서도 고의로 은폐했다는 것. 한국보다 앞서 직물산업이 발전했던 일본-유럽 등에서는 이미 이황화탄소 중독 발현 문제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당시는 지금처럼 민간에서 정보를 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이를 악용한 원진 레이온은, 직원들이 이상 증상을 호소해도 개인의 건강과 자기관리 문제로 치부하며 사실을 감추고 어떤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직원들은 회사의 말만 믿고 아무 것도 모른채 성실하게 일만 하다가 하루하루 병들어가고 있었던 것.
김봉환씨를 비롯하여 많은 직원들이 원진레이온에서 일하다가 건강 상태가 나빠져서 퇴사해야 했다. 원진레이온에서 퇴사한 후 비슷한 병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지만 아직 자신들의 병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김록호 원장이었다. 그는 환자들에게 "여러분들의 병명은 이황화탄소 중독이다. 이를 '직업병'이라고 한다"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진실을 알게된 피해 노동자들은 회사 사장실로 몰려갔다. 하지만 사장은 도피했고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피해 노동자들은 사장실에서 노동부가 발급한 '무재해 인증서'와, 34명에 이르는 직업병 피해자들을 산재 처리 대신 공상 처리한 서류를 발견하고 충격에 빠졌다.
공상 처리는 분쟁이 발생했을 때 노동자가 회사로부터 한 번의 보상을 받고 합의해주는 방식을 뜻한다. 회사로서는 복잡하고 산재 처리보다 훨씬 유리한 방식이었다. 회사는 피해 노동자의 가족들을 찾아가 돈으로 회유하여 입막음을 하려고 했다. 생계가 막막했던 일부 피해자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회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경우도 있었다.
▲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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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살인기업 원진레이온은 대체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1960년대 '경제 성장'이 국가적 목표였던 대한민국은 일본과 '한일협정'을 체결했고, 일본 측은 사과 하나 없이 달라고도 하지 않았던 중고 레이온 기계를 배상에 포함시켰다. 일본은 당시 36억 엔(현재 한화 약 900억)에 이르는 레이온 기계로 배상금을 일부 대체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해당 기계로 더 큰 이익을 거둘 수 있다는 계산을 가지고 일본의 제안을 수용했다. 또한 이러한 정부의 결단을 촉구하는데 앞장선 것이, 화신그룹 총수였던 박흥식이라는 인물로 악명높은 친일파 출신 기업가였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미 1930년대부터 레이온 기계로 인한 직업병 발생으로 여러 차례 문제가 된 바 있고, 박흥식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일본으로서는 배상을 핑계로 골칫덩어리를 한국에 손쉽게 떠넘긴 셈이었다. 또한 거래를 종영했던 박흥식은 정작 레이온 기계를 들여온 지 얼마 안 되어 회사를 넘겨버리고 떠났다. 결국 그 후로 20년 동안 죄 없는 우리 노동자들만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1988년부터 피해 노동자들이 힙을 합쳐 회사와 노동부에 책임을 물었지만,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는 이가 없었다. 그 사이 피해 노동자들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늘어갔다.
벼랑 끝에 몰린 피해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1988 올림픽 성화봉송로를 막고 시위를 벌였다. 전세계적인 관심이 몰리는 올림픽을 이용하여 절박한 상황을 호소하려고 했던 것. 결국 부담을 느낀 정부측에서 회사를 압박하면서 올림픽 개막 3일 전에야 간신히 회사와 피해노동자들간 협상 자리가 마련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싸움은 이제 시작일뿐이었다. 피해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질병을 직업병이라고 인정하고 산재 처리를 해줄 것을 요구했다. 직업병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전문가 판정단 6인이 구성됐고, 노동자측 의사로 합류한 것이 김록호 원장이었다. 김 원장은 "빼도 박도 못하는 확실한 의학적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환자들에 대하여 가장 잘알고 많이 공부한 사람으로서 역할을 해내야한다는 비장함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판정단 6인 중 회사측이 고용한 것은 국내 유명 대학 교수 3명, 반면 노동자측은 김 원장을 비롯하여 세 명 모두 가정의학과 출신이었다. 회사 측 의사들은 자신들보다 '급'이 떨어지는 피해 노동자 측 의사들을 무시했다. 김 원장이 다양한 해외사례까지 동원하며 학문적-의학적인 증거를 내놓아도 여전히 회사 측 의사들은 '이황화탄소 중독을 증명할 특수한 증상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논리로 개인의 질환이라는 입장만 고수할뿐이었다. 그렇게 몇달간 협상은 좀처럼 풀리지 않으며 평행선을 달렸다.
고심 끝에 김 원장이 선택한 마지막 승부수는 '신장 조직 검사'였다. 김 원장은 회사측 의사들이 지나가던 말로, 환자들이 공통적으로 소변에 정상수치 이상의 단백질이 나오는 단백뇨 증상을 보인다고 언급한 사실에 주목했다.
하지만 김 원장은 당시 위중하던 환자들이 조직검사를 견딜수 있는 몸상태가 아닌데다 오히려 정반대로 판정에 불리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기에 잠시 주저했다. 회 사측 의사들은 만일 신장 조직 검사에서 특이 소견이 나온다면 산재를 인정하겠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장고를 거듭하던 김 원장은, 사실상 모든 것을 걸고 조직 검사를 시도해보기로 결정했다.
검사 결과 환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이황화탄소 중독에서 나타나는 '기저막 비후' 증상이 발견됐다. 김 원장이 그토록 절실하게 찾아헤맸던 직업병의 증명할 근거가 마침내 밝혀진 것이다.
이에 회사 측을 포함한 6명의 판정단 의사들 전원이 결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억울하게 고통받아야 했던 40여 명의 피해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병을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생존자인 김장수씨는 "직업병 판정받고나서, 지금 아이들과 살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감회를 밝혔다.
하지만 또다른 피해자였던 김봉환씨는 보상을 받지 못했다. 퇴사후 몇 년이 지난 뒤에야 뒤늦게 사당 의원을 찾아 진료를 받고 자신의 병명을 알게된 봉환씨는 회사에 요양신청과 산재 처리를 요청했다. 그러나 회사 측은 그가 비유해 부서에 근무했기 때문에 신청 대상이 아니라고 거부했다. 회사는 산재가 인정된 뒤에도 어떻게든 보상 인원을 줄이기 위해 일부 부서만 유해 부서로 지정하고 무려 3분의 2에 해당하는 곳은 비유해 부서로 분류하며 끝까지 꼼수를 썼던 것.
봉환씨는 노동부에 몇 번이고 애원한 끝에 3개월 만에 노동부에서 예외적으로 요양 신청을 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봉환씨는 요양신청을 끝내 하지 못했다. 노동부의 연락을 받았던 바로 그날 딸의 입학금을 내고 돌아오는 길에 봉환 씨는 갑지기 쓰러졌고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비극이 알려진 후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과 슬픔에 분노했고, 김록호 의사를 비롯한 노동자들도 함께 힘을 모아 장례 투쟁에 돌입했다. 여론이 움직이자 결국 국회가 뒤늦게 현장 조사를 실시했고 "원진 레이온의 비유해 부서 직원들도 이황화탄소 중독될 개연성이 충분해 보인다"는 결론을 내리며 마침내 원진에서 근무했던 모든 노동자들에 대한 직업병이 인정받게 됐다.
1993년 세간의 지탄을 받던 원진 레이온은 끝내 폐업했다. 하지만 비극의 악순환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기계 레이온은, 폐업 이후 이번엔 중국으로 수출됐다. 일본이 우리에게 했던 짓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었다. 이에 원진 노동자들이 중국 대사관에 찾아가 실상을 알렸으나 중국 정부는 이를 무시했고 수많은 중국의 무고한 노동자들이 또다시 같은 비극을 겪어야 했다.
원진 레이온 참사로 인한 피해노동자는 950여 명에 이르며 이 중 308명이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산업재해로 불리우는 원진 참사가 세상에 알려질수 있었던 데는, 불의와 현실에 침묵하지 않았던 피해 노동자들의 절박한 외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후 공장이 있던 자리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부지를 판 금액의 일부를 보상금으로 받은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을 위한 '원진 녹색병원'을 건립했다. 김록호 의사가 초대 원장을 맡았다.
당시 함께 세상과 싸웠던 사람들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서로의 마음을 기억하며 끈끈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었다. 평범한 동네 의원의 원장이었던 김록호 의사는 현재는 스위스 제네바 세계보건기구(W.H.O)에서 근무하며 세계인의 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록호 의사는 원진레이온 사건을 회상하며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나 싶다. 본인들만이 아닌 다른 노동자들의 권리까지 지켜낸 것"이라며 피해 노동자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했다. 생존한 피해 노동자들도 김록호 의사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개개인은 약해 보여도 함께 뜻을 모아 하나가 되었을 때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 그리고 질병을 낫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질병을 앓게 된 원인을 알고 고쳐야 한다고 한 의료인의 신념이 큰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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