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님과 의원님, '킬러 문항'의 늪에서 빠져나오십시오
[서부원 기자]
▲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26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사교육 경감 대책을 발표한 뒤 기자들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 권우성 |
맥락도 없이 경쟁적으로 마구 던지는 말들이라 당최 무슨 뜻인지조차 이해 안 된다. 사교육을 억제한다면서 자사고와 외고, 국제고 등을 존치시킨다고 하고, '킬러 문항'만 출제하지 않으면 대입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떠들어댄다. 급기야 '공정 수능'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사교육에 다걸기 하는 건, 오로지 의치대와 명문대 합격을 위해서다. 단언컨대, 다른 목적은 없다. 국영수 보습 학원은 말할 것도 없고, 음악과 미술, 체육 실기 학원도, 심지어 요가원이나 명상 수련원에 다니는 것도 대입을 앞두고 마음의 평정을 위해서다.
몇 해 전부터 자사고와 특목고의 인기가 급격히 식은 것도 대입에 불리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중학교 때 최상위권이었던 아이들을 상대평가로 한 줄을 세우면, 내신 등급이 일반고에 견줘 상대적으로 뒤처질 수밖에 없다. 일반고로 진학한다면 1~2등급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내신 성적만 반영하는 학생부교과전형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학생부종합전형에서도 뒤처진 등급을 만회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결국 수능에 목매달고 기꺼이 'n수'도 불사하는 '정시 파이터'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정시 비율이 늘어날수록 그들에겐 꽃놀이패인 이유다.
그들이 얼마 전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발표한 절대평가 체제 도입과 고교학점제 전면 시행의 최대 수혜자라는 점에 대해선 이견이 없다. 수시와 정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자사고와 특목고 진학은 초등학생과 중학생에게 대입이라는 '본고사'를 치르기 위한 '예비고사'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킬러 문항' 금지만으로 사교육을 잡을 순 없다
자사고와 특목고는 예전부터 사교육의 '블루오션'이었다. 듣자니까, 벌써 자사고와 특목고를 대비하기 위한 전문 학원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벽에 내걸려있던 '킬러 문항 대비 전문'이라는 홍보물은 떼어지고, 대신 '준 킬러 문항'을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광고 전단이 뿌려지고 있다. 이게 카멜레온 같은 사교육의 생리다.
▲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 남소연 |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교육의 메커니즘에는 눈 감은 채, 주야장천 '킬러 문항 배제'만 돌림노래처럼 불러대고 있으니 민망할 따름이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킬러 문항의 부담에서 벗어났다는 것에 대해 안도하는 분위기"라며 현장의 반응을 전하며, "정부의 방침에 혼란을 느끼고 분노하는 사람들은 킬러 문항으로 부당 이득을 취한 사교육 카르텔"이라고 비판했다.
확증편향도 유분수지, 대체 그가 본 학교 현장은 어디이고, 정부의 방침에 분노하는 이들을 사교육 카르텔이라고 단정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명색이 여당의 원내대표인데, 그는 지금 학교 안팎이 술렁대고 있는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수험생과 학부모, 교사 모두 당혹스러워하는 건, '킬러 문항'의 출제 여부와 직접적 관련성이 없다.
왜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까지 나서서 느닷없이 수능 출제 문제를 거론하며 그러잖아도 예민한 수험생의 불안을 자극하느냐는 점이다. 교육부 장관이 대통령의 의중을 잘못 전해 평지풍파를 일으켰다며 경고까지 줘놓고선, 여당의 원내대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킬러 문항'에 다걸기 하고 있으니 흡사 '봉숭아 학당'을 보는 느낌이다.
기존의 '킬러 문항' 대신 '출제 기법 고도화'를 통해 변별력을 갖춘 문항을 출제하겠다는 설명도 불안을 부추기고 있다. '출제 기법 고도화'의 방법을 묻는 질문에 교육부는 "9월 모의평가 때 보여줄 것"이라며 즉답을 회피하고 있다. 거칠게 말해서, 수능이 두 달여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새롭게 바뀐 출제 유형에 각자 알아서 적응하라는 이야기다.
대수술 필요한 몸에 반창고 하나 붙이겠다니
개인적으로, 수능에서 '킬러 문항' 출제를 배제하는 것에 대해선 100% 찬성이다. 의치대나 명문대를 지망하는 극소수 최상위권을 위한 사교육 업체라면 몰라도, 수험생과 학부모, 교사 모두가 동의하리라 본다. 그런데도 울며 겨자 먹기로 출제해온 건, 최상위권 내의 변별 수단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수험생 중 최소 열에 일곱은 '킬러 문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수능 수학 영역의 경우, 15번, 22번, 30번을 '킬러 문항'으로 번호까지 고정해둔 건, 중하위권 아이들에게 "너희들과는 상관없으니 그냥 찍어라"고 조언하는 출제자의 '배려'다. '킬러 문항'은 최상위권을 다시 세분화하여 한 줄 세우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6월 모의평가 보는 수험생들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6월 모의평가가 열린 1일 오전 서울 양천구 목동 종로학원에서 수험생들이 문제를 풀고 있다 |
ⓒ 연합뉴스 |
윤 원내대표가 '듣고 싶고, 보고 싶은' 현장 말고, 현직 교사로서 지금 학교 안팎의 솔직한 분위기를 전한다. 윤 대통령의 느닷없는 발언으로 시작된 혼란이 바이러스처럼 변이를 일으키며 예상치 못한 불안을 만들고 있다. 사실 '킬러 문항' 한두 개에 애면글면하는 아이들은 의치대와 명문대 진학을 염두에 둔 최상위권과 이른바 '등급 컷'을 걱정하는 상위권이 전부다.
나머지 대다수는 '다른 나라 이야기'로 치부하며 심드렁한 표정이지만, 일부 아이들은 이번 혼란의 '유탄'에 맞지나 않을지 걱정하기도 한다. 나름대로 현재의 수능 유형을 반복적으로 연습해왔는데, 갑자기 낯선 문항이 튀어나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다. 차라리 부담 없이 찍고 마는 '킬러 문항'이 출제되는 게 더 마음 편하다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이 장관과 윤 원내대표께 충언하건대, 부디 '킬러 문항'의 늪에서 하루빨리 빠져나오길 바란다. '공정 수능' 따위의 의미조차 모호한 미사여구는 온 국민의 비웃음만 살 뿐이다. 온존한 학벌 구조, 빈부 차에 따른 성적 격차,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 등의 위기 상황에 우리 공교육은 대처할 힘을 잃었다. 대수술이 필요한 몸에 애꿎은 반창고 하나 붙여놓고 효능 운운하는 게 가당찮아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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