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없으면 웰다잉도 없다”…연명의료결정법 뒤편 ‘회색지대’
의식 불분명한 경우 가족 동의 있어야 연명치료 중단 가능
“무연고자 위해 대리결정자 의견 인정 등 법적 개선 필요”
# 55세 최주영(가명) 씨는 사업 부도로 빚더미에 앉고 노숙자로 길거리를 전전했다. 유일한 가족인 누나와도 연을 끊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간암 말기 진단을 받고 길어야 수개월 생존할 수 있다는 시한부 판정까지 내려졌다. 복수로 배는 차오르고, 간성혼수가 오면서 섬망, 환각 등 증상이 심각해지자 결국 병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최 씨는 “더는 아프고 싶지 않다. 모든 치료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지만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하기엔 의식상태가 분명하지 않다는 의료진의 대답만 돌아왔다. 최 씨가 연명의료를 중단하려면 혈육인 누나의 동의가 필요한데, 병원의 거듭된 시도에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는 병원생활 2개월 만에 심정지가 왔고 1시간30분 동안의 심폐소생과 온갖 약물 투여를 받은 후 다시 살아났다. 하지만 눈 한번 뜨지 못한 채 이내 숨을 거뒀다.
연명의료결정법 제도가 시행된 지 5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자신의 연명치료 여부를 선택할 수 없는 ‘회색지대’에 놓인 환자들이 존재한다. 연명치료 중단을 대신 결정해 줄 가족이 없거나 연락이 안 돼 고통을 끝까지 가져가야 하는 무연고 환자들이다. 전문가들은 이들의 연명의료 중단 기회가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연명의료결정제도는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무의미한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의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할 수 있는 기준과 절차를 마련한 제도를 말한다. 이는 지난 2018년 2월4일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르면 환자는 담당의와 해당 분야 전문의 1명에게 질환 말기나 임종 과정에 있다는 의학적 진단을 받을 경우 연명치료를 이어갈지, 중단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임종 과정’은 회생 가능성이 없고, 치료를 해도 회복되지 않으며, 증상이 급격히 악화돼 사망이 임박한 상태를 말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환자의 결정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또는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을 통해 이뤄진다.
환자가 의식이 없거나 연명의료계획서 등을 미리 작성하지 못한 상황이라면 환자 가족 2인이 연명의료에 관한 환자의 의사를 진술할 수 있다. 또 환자 가족 전원이 합의해 연명의료 중단을 진행할 수도 있다. 가족이 없는 무연고자의 경우 사전에 연명의료계획을 피력하지 않은 이상 치료를 중단하기 어렵다.
실제 연명치료를 접은 사례들은 대부분 가족 동의에 의한 결정이었다. 서울대병원 연구팀이 2018년 2월부터 2021년 2월까지 3년간 서울대병원 의료기관윤리위원회 임상윤리 지원 서비스에 의뢰된 60건의 사례를 분석한 결과, 의뢰 환자의 90% 이상이 의사결정 능력이 결여된 상태였다. 그 중에서도 26.7%의 환자만 문서나 구두로 연명의료에 대한 본인의 의사를 밝혔다.
환자가 자신의 의사가 분명할 때 연명의료를 결정하는 것도 어려운 환경이다.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르면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에 한해 연명의료 유보·중단 결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서울대병원 조사 결과, 의뢰 환자의 66.7%는 임종 과정 기준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려운 상태인 것으로 확인됐다. 다수의 사례에서 임종 과정 판단 기준이 모호하고 의학적 불확실성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환자 대신 가족이 결정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의료진이나 제3자가 연명의료 중단 여부를 판단해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짚었다.
임재준 서울대병원 공공부원장(전 의료기관윤리위원회 위원장)은 “현행법 체계에서는 의료기관윤리위원회의 심의 결과가 권고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라며 “적절한 대리 의사 결정자가 없는 무연고 환자의 경우 의료기관윤리위원회에서 다양한 전문성을 가진 위원들이 모여 고민한 결과를 반영할 수 있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유신혜 서울대병원 완화의료·임상윤리센터 교수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됐지만 아직도 임상 현장에서는 임상적 불확실성이 높고 환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가치를 추정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있다. 또 다수의 사례에서 적절한 가족이 없어 윤리적 의사 결정이 어려운 회색지대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법적으로 지정된 가족이 아닌 자가 대신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대리인 제도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국내 현실에 맞는 대리 의사 결정 방식이 무엇인지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 등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현재 국회엔 무연고자의 연명의료 중단에 대한 의사를 확인해 줄 수 있는 범위에 환자가 미리 지정한 대리인을 추가하고, 종합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에 의료기관윤리위원회 설치를 의무화하는 법안이 제출된 상태다.
김상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2월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김 의원은 “현행 제도로는 무연고 환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 사실상 연명의료를 중단할 길이 없다. 친분이 있더라도 가족과 친족이 아니라면 연명의료 결정과 관련해 어떠한 결정도 할 수 없는 현실”이라며 “죽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하고 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이다. 연명의료결정제도의 사각지대 해소와 제도 개선을 위해 하루 빨리 개정안이 통과돼야 한다”고 언급했다.
박선혜 기자 betough@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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