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짜리 위스키파티 연다…'탈중국' 中갑부들 몰려간 이 나라
요즘 중국 부자들 사이에서 가장 뜨고 있는 와인바는 어디에 있을까. 상하이 중심가 오피스타워의 최고층, 베이징 고급주택의 안뜰을 떠올렸다면, 틀렸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이 와인바는 중국 본토가 아니라 싱가포르에 있다. 싱가포르 중심부의 6차선 도로 ‘스코츠로’ 옆에 있는 ‘서클33’이란 이름의 와인바다. 진시황릉 병마용, 거북이·학 조각상 등 고풍스러운 중국 골동품과 조형물로 장식된 넓은 뜰을 가진 방갈로에 있다.
싱가포르로 이주한 중국 부자들이 급증하면서 떠오른 '핫플레이스'다. 매체는 “중국에서 싱가포르로 처음 이주한 부자가 통과의례처럼 한번은 가봐야 하는 곳”이라며 “이곳 회원들은 최고급 쿠바산 시가를 피우고 보르도 와인을 마시며 새벽까지 수억 달러 이상의 자금을 어떻게 굴릴지 논의한다”고 전했다.
중국 부자들의 ‘차이나 엑소더스’ 가 가팔라지고 있다. 3년 가까이 이어진 제로 코로나 정책에 지친 데다, 침체된 중국 경기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어서다. 여기에 ‘공동부유(共同富裕)’를 내건 공산당의 예측 불가능한 규제에 대한 두려움까지 겹치면서 해외 이민이 늘고 있다. 이민 컨설팅 업체 헨리앤파트너스에 따르면 지난해 금융자산이 100만 달러(약 13억원·부동산 제외한 유동자산 기준) 이상인 고액자산가(HNWI)가 가장 많이 빠져나간 나라는 중국이다. 지난해 1만800명의 HNWI가 이탈했고 올해는 1만3500명의 백만장자가 떠날 것으로 예상된다.
본토를 떠나는 중국 백만장자들이 주로 향하는 곳은 싱가포르다. 지난 4월 파이낸셜타임스(FT)는 중국인 부유층과 전문직을 중심으로 부는 싱가포르행 투자 이민 열풍을 전하면서 “중국 내 경제 및 사회 문제가 심화하는 가운데 싱가포르를 자신들에 불어닥칠 폭풍우를 헤쳐나갈 수 있는 배로 여기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싱가포르로 이주한 HNWI는 2900명으로 2019년에 비해 약 90% 증가했는데 다수가 중국인이다. 자산정보업체인 뉴월드웰스의 앤드류 아몰리스 수석연구원은 “올해 최대 3500명의 HNWI가 싱가포르로 이주할 것이며 대부분이 중국인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발 ‘부의 이민’으로 싱가포르엔 돈이 몰리고 있다. 싱가포르 통화청(MAS)에 따르면 고액 자산을 관리하는 가족법인 ‘패밀리 오피스’는 2018년 50개에서 2021년 700여개로 3년 만에 14배 커졌다. FT는 패밀리 오피스가 지난해엔 약 1500개로 늘었다고 추정하면서 증가분의 절반 이상이 중국 본토 부유층에 의한 것이라고 전했다.
패밀리 오피스를 통해 중국 부자들은 투자·재산 이전 등의 각종 금융 문제를 해결하고, 싱가포르 정부가 제공하는 소득세 감면 혜택도 받는다. 패밀리 오피스의 최소 자산 관리 규모가 2000만 싱가포르 달러(약 193억원)에 이르지만, 인기가 높다. 이에 힘입어 싱가포르에서 운용되고 있는 자산은 2021년 4조7000억 싱가포르 달러(약 4552조원)에서 지난해 5조4000억 싱가포르 달러(약 5231조원)로 늘었다.
“10억짜리 위스키 파티에 VIP클럽엔 마오타이 넘쳐”
싱가포르 투자이민 컨설팅회사 AIMS의 피어스 청 최고경영자는 “중국인 고객들은 한병에 80만 달러(약 10억원)하는 일본 야마자키 55년산 위스키를 제공하는 파티를 연다”며 “이들을 위해 6만1000달러(약 8000만원) 하는 시가를 대신 사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싱가포르엔 고가의 비용을 내야 하는 호화로운 와인·칵테일 바가 많은데, 최근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VIP클럽과 고급 레스토랑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며 “여기선 중국인의 향수를 달래주는 전통주 마오타이(茅台) 수요가 급증했다”고 전했다.
“지난해 상하이 봉쇄 계기로 싱가포르행 급증”
중국 부자들의 엑소더스는 지난해 4~5월 중국 경제의 중심인 상하이가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전면 봉쇄된 사건이 전환점이 됐다. 당시 상하이 시민들은 이동의 자유가 제한된 채 식량과 생필품 부족에 시달렸고, 이후 최상위 부유층은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한 해외 이주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공동부유를 내세우며 회사를 옥죄는 것에 힘들어하던 기업인들이 지난해 10월 시 주석의 3연임이 확정되자 재산을 지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탈출에 나섰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 2월 종적을 감췄다가 중국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는 거로 드러난 투자은행 차이나르네상스의 바오판(包凡) 회장이 대표적이다. 바오 회장은 조사를 받기 전인 지난해 12월 싱가포르에 패밀리 오피스를 세우고 자신의 재산 일부를 싱가포르로 옮기려 했다고 FT가 보도했다.
지난달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가 48.8로 두 달 연속 50 아래를 밑돌고, 16~24세 청년실업률이 20.8%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리오프닝’(경제 활동 재개) 효과는커녕 경기침체를 우려해야 하는 중국 경제 상황도 부자들의 이탈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에 중국 부유층 사이에선 상하이 봉쇄 전 1500만 위안(약 27억원) 정도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봤던 싱가포르 이민에 필요한 금액이 현재는 1억 위안(약 180억원)에 육박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SCMP는 “상하이에서 매물로 나온 주택은 3월 중순 10만채에서 4월 말 20만채로 급증하며 집값이 10% 이상 하락했다”며 “외국으로 이주를 계획하는 부유층들은 가격을 낮추더라도 집이 팔리기를 바라고 있다”고 전했다.
“말 통하고, 서방 제재 없는 싱가포르가 좋아”
우크라이나 전쟁 등 국제정세도 한몫했다.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 부유층을 대상으로 경제 제재를 가한 것에 중국 부유층은 충격을 받았다. 중국 부자를 연구하는 시장조사기관 후룬리포트의 루퍼트 후지워프 회장은 “중국 부자들은 미국·유럽·호주 등에선 자신의 재산이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한다”고 말했다.
중국인 부동산 싹쓸이에 고심 큰 싱가포르 정부
이로 인해 싱가포르 주택 가격은 지난 1분기 전년동기 대비 11.3% 상승했다. 지난해 4분기 주택 임대료도 1년 전보다 28.2% 올라 뉴욕(18.6%), 런던(17.8%) 등을 제치고 상승률 1위를 기록했다. 치솟는 집값에 싱가포르 정부는 규제에 나섰다. 지난 4월 외국인이 주택을 구매했을 때 내는 재산세 비율을 집값의 30%에서 60%로 상향했다. 3월엔 투자 이민에 필요한 1인당 최소 투자금액을 250만 달러(약 33억원)에서 1000만 달러(약 132억원)로 올렸다.
그럼에도 중국인의 싱가포르행은 계속될 전망이다. 주재우 경희대 중국학과 교수는 “상하이 봉쇄로 자유의 중요성을 절감한 중국 부자들이 자산 이전을 시도중인데 중국 정부가 해외 투자를 제한하며 자본유출을 통제하고 있다”며 “남은 선택지는 이민밖에 없고, 서방 제재에서 자유로운 싱가포르가 최적지”라고 말했다.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은 “한국은 강한 반중 정서와 남북 대치상황 등으로 인해 중국 부자에게 인기가 없다”고 말했다. 미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답한 한국인의 비율은 80%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대신 부동산 투자처로선 각광을 받고 있다. 지난해 국내 부동산을 소유한 외국인 중 중국인이 7만7008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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