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기·승·전·수사’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
논리는 대화와 타협 멈추게 해
정치가 해결할 부분을 수사와
감사가 대신하고 있다는 의미
갈등을 수사로 해결하려 하면
검사 약진 계속될 수밖에 없어
적폐청산·180석에도 성과 못낸
전임 정부를 반면교사 삼아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개인정보 유출 의혹을 수사 중인 경찰이 지난달 말 MBC 기자와 사옥, 국회 최강욱 의원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과잉 수사라는 지적이 나오자, 한 장관은 “불법적인 정보를 유포하고 악용하면 안 된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라며 “그냥 넘어가면 다른 국민들이 이런 일을 당해도 당연한 것이 될 것”이라고 답변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불법적인 정보 유포 수사를 비난하긴 쉽지 않다. 정치적 의도를 공격할 수는 있다. 하지만 불법을 수사하겠다는데, ‘불법이 있어 보이지만 무리하게 수사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논리가 옹색하다. 이 지점에서 대화는 멈출 수밖에 없다.
대통령실은 지난 26일 사교육 이권 카르텔과 관련해 “사법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면 그 부분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교육이 문제이니, 공정거래위원회 경찰청 교육청이 모여 사교육 카르텔을 때려잡겠다는 것이다. 이틀 뒤인 28일 국세청이 대형 사교육업체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세금을 내지 않았다면 조사가 필요하다. ‘사교육 시장에 불법이 있는데 수사해야 한다’고 말하면 반대할 명분이 없다. 지금 윤석열정부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의 진행 방식이 대개 비슷하다. 개혁 과제를 천명하고, 반발과 갈등이 벌어지면 수사가 시작된다. 수사가 어려우면 감사를 벌이고, 세무조사도 등장했다. 노동 개혁, 원전, 교육, 남북 문제 등이 대부분 ‘기·승·전·수사’로 진행되고 있다. 정치가 해결할 부분을 수사가 대신하는 셈이다.
여권 인사들이 사석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저 사람들(더불어민주당)은 우리가 망하기만 바란다”는 말이다. 자신들이 망하기만 바라는 사람들과 무슨 대화를 하느냐는 것이다. 이쪽이 한 발 뒤로 물러나면 저쪽도 한 발 물러서야지 타협이 이뤄진다. 그런데 이쪽이 한 발 뒤로 물러나면 두 발, 세 발 물러나길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과거 보수 정권에서 축적된 경험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광우병과 사드 사태, 세월호 조사 등이 대표적이다. 대책을 논의하고 해결책을 마련하면 될 상황이 보수 정권의 위기로 이어졌다.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진 이상 민주당, 노동조합, 시민단체는 제압할 대상이고, 검찰 경찰 감사원은 핵심적 제압 수단이 됐다.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는 여러 차례 “검사 공천은 없을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런데 여권 주변에서는 검사 공천설이 사라지지 않는다. 검핵관 출마설, 30명 공천설, 100명 공천설이 나돈다. 정부의 문제 해결 방식이 변하지 않으면 한 장관을 포함해 검사 출신들이 대거 출마할 가능성이 크다. 윤석열 대통령은 검사 출신을 중용하겠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검사 출신이 정부 요직에 대거 등용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정부 부처와 대통령실, 국가정보원 요직은 물론 금융감독원장, 국무총리 비서실장,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상근전문위원 등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도 검사 출신을 기용했다. 갈등을 수사로 푸는 방식이 계속되는 이상 수사에 능한 검사 출신의 약진은 당연한 수순이다.
수사와 감사는 사람과 조직을 위축시킨다. 라면 업체들이 추경호 부총리의 발언이 나온 지 열흘 만에 라면값을 내렸다. 라면값을 내리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교육업체들도 당분간 몸을 사릴 것이다. 모두 아는 것처럼 라면값 50원을 내린다고 물가가 잡히지 않는다. 사교육업체 세무조사를 한다고 사교육이 사라지지 않는다. 수사는 입을 막을 수 있어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수사는 마지막 설거지 작업이지 음식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아니다.
문재인정부는 적폐청산을 한다며 집권 초반 2년을 허비했다. 적폐청산은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지금은 그런 상황도 아니다. 윤석열정부는 전임 정부를 비판하면서 비슷한 길로 가고 있다. 게다가 업그레이드 버전도 아닌 다운그레이드 버전의 길이다. 국정 운영의 성과를 내기 위해서라도 윤 대통령은 수사 대신 다른 노선을 찾아야 한다. ‘기·승·전·수사’ 방식을 고수하면, 총선에서 여권이 승리하더라도 달라지는 게 없을 것이다. 타협을 하는 곳이 국회인데, 의석수가 많아 봐야 어디에 쓸 것인가. 민주당은 지난 총선에서 위성 정당을 합쳐 180석을 얻었다. 그 의석을 가지고 뭘 했는지 ‘검수완박’ 외엔 기억에 남는 게 없다.
남도영 논설위원 dy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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