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의 한반도평화워치] 과거에 발목 잡힌 한·일…천황 방한 추진해 미래 화해로 가야
한·일 관계가 길고 긴 동면에서 깨어나는 데 채 두 달이 걸리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의 포용적 결단으로 성사된 일본 방문에 대한 기시다 총리의 호응은 예상보다 빨랐다. 5월 7일 총리의 답방이 이루어졌고, 이어서 G7에 참가한 윤 대통령은 5월 21일 히로시마 평화공원 내 한국인 원폭피해자위령비에 총리와 함께 참배했다. 이로써 12년 만에 셔틀외교가 복원되었고, 2018년 강제 징용 대법원 판결 이후 발생한 외교적 갈등이 5년 만에 해소되었다.
이 과정에서 방한 시 총리의 사죄 표현이 초미의 관심을 모았다. 그는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포함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는 말에 이어 “당시 엄혹한 환경 속에서 많은 분들이 매우 힘들고 슬픈 체험을 하신 사실에 대해 저 역시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라고 개인적 소감을 밝혔다. 야당과 현 정부에 비판적인 사람을 비롯하여 국민의 다수는 기대에 못 미치는 표현으로 평가절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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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셔틀외교 복원에도 난제 많아
2025년은 국교정상화 60주년
천황 방한과 신조약 체결 호기
한·일화해위 설치 등 지혜 필요
」
한·일 관계 역주행 차단 기획
그러나 나는 윤 대통령의 결단에 응답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던 기시다 총리가 일본 국내의 압박과 제약 속에서 한국인이 품고 있는 식민 지배의 부정의에 대해 공감을 표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나아가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대한 한국인의 마음을 존중하고자 한 진정성을 높이 사고 싶다.
양국 정상의 리더십은 분명한 효과를 가져왔다. 한·미·일 삼각 협조체제가 구축되었고, 무역 제재가 해제되었으며, 초계기 갈등이 봉합되었고, 인적 교류가 확대되었다. 상호 신뢰 속에서 포용론적 화해를 이루고자 하는 공감대가 빚어낸 결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장밋빛 미래가 전개되리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일 수 있다.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으로 열었던 한·일 화해 2.0 시대가 역사 교과서 문제에 부딪히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어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 영토 갈등, 위안부 문제 등이 부상하면서 한·일 관계는 역주행을 거듭했다. 따라서 지금은 한 치도 낙관할 수 없다. 징용자 문제에 대한 섬세하고 치밀한 후속 조치는 물론, 언제든지 부상할 수 있는 역사 문제의 현안들을 신중하게 관리하며 한·일 관계를 전진시켜야 한다.
그러나 소극적 관리만으로는 역주행을 방지하지 못할 것이다. 총리의 답방 직후인 지난 5월 11일 총리 공저에서 진행된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과의 특별대담에서 확인되었듯 당분간 총리의 추가적인 사죄 표현과 피고 기업의 기금 참여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에 만족하지 않는 한국 측의 반발은 지속할 것이다. 따라서 역주행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고 미래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 기획이 필요하다. 나는 한·일 신조약을 체결하여 한·일 화해 3.0 시대로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일 신조약이 식민지배의 불법성 여부와 같은 1965년 한·일 조약에서 봉합한 사안을 의제로 삼아 해결하려고 한다면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 대신 한편으로는 지속되는 과거사 문제들이 심화하지 않도록 방안을 모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롭게 등장하는 현재적 과제를 협력적으로 대처하는 데 협의를 집중하여 도출된 방안들을 제도화할 수 있다면 한·일 화해 3.0의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
‘책임론적 화해’ 장벽 넘어야
물론 다양한 걸림돌이 신조약 체결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 그중에서도 한·일 화해 2.0 시대에 군림했던 책임론적 화해론이라는 견고한 사유의 장애물을 넘어서지 않고는 신조약 성사를 기대하기 어렵다.
화해하자며 끊임없이 일본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켰고, 마침내 징용자 문제에 이르러 파탄 직전까지 다다른 역설적 현상을 겪었다. 막대한 비용을 치른 후 포용적 결단으로 책임론적 화해론이 초래한 부작용을 가까스로 수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애를 쓰고도 ‘도의적 책임’에 기반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는 간접 표명과 총리의 개인적 소감을 얻어내는 데 그쳤을 뿐이다. 신조약의 체결은 이러한 책임론적 사유의 틀을 넘어서야 가능하다. 이를 위해 천황의 방한을 추진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천황은 일본 헌법 제1장에 규정되어 있다.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이 있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 통상 전전의 인격신으로서 절대 권력을 갖고 있던 천황과 차별하여 상징 천황이라고 한다. 평화 애호자인 아키히토(明仁) 전 천황은 재위 중에 동남아 국가 및 중국 등을 방문하며 사죄의 표현을 함으로써 일본과의 우호 관계 증진에 기여한 바 있다.
1992년 일본 천황의 방중 성과
이제 2019년에 황위를 계승한 나루히토(德仁) 천황이 방한하여 한국인의 과거사 인식에 공감하는 적절한 사죄 표현을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일본을 상징하는 존재가 표명한 ‘상징 책임’으로 포용하고 환대하자. 이를 통해 무한 책임 추궁에서 벗어나 미래로 나아가는 화해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
천황 방한이 시기상조라는 반론도 예상된다. 만에 하나 불상사가 발생하면 양국 관계의 악화를 초래할 것을 우려한다. 1992년 아키히토 천황이 중국을 방문할 때도 그런 우려가 제기되었지만 천황의 방중은 이후 중·일 관계 발전에 기여했다.
중요 인물의 역사적 행위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조건이 성숙하여 그 행위를 통해 한 국면의 대미를 장식하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조건이 무르익지 않았지만 그 행위를 통해 역사를 추동하는 경우다. 모든 여건이 다 갖추어진 후의 방한이라면, 언제인지 알 수 없고 방한의 의미도 작다. 지금 한국은 천황 방한을 포용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천황의 상징 책임을 계기로 책임론적 화해론을 넘어선다면 신조약 체결의 길이 열릴 것이다.
신조약을 체결하는 최적의 시점은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이 되는 2025년이다. 천황 방한과 신조약 체결이라는 미래지향적 기획은 기존의 외교 업무만으로는 감당하기 버겁다. 한일화해위원회를 설치하고, 일본과 함께 양국의 경험과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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