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19세기 아편전쟁 이후 화교 급증, “중국 돕자” 바람 일어
화교(華僑)의 탄생과 확산
그러나 통용되는 화교의 개념은 국적을 막론하고 ‘중국인’의 사회적·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모든 사람을 포괄한다. 국적이 생활과 활동의 현실적 조건인 만큼 그 취득 여부를 정체성 판단의 기준으로 삼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근대적 국적제도가 자리 잡기 이전 역사 속의 화교를 고찰하는 데는 국적의 기준이 의미가 없다. 사실 ‘화교’란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 말 이후다. 그 전에 중국 밖의 중국인은 흔히 ‘당인(唐人)’이나 ‘한인(漢人)’이란 이름으로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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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세기부터 동남아 거주집단 생겨
청나라 무너지며 해외 이주 러시
18세기까지는 현지 세력과 동화
쑨원 혁명 지원하며 ‘중국인’ 자각
80년대 이후 미국·유럽 진출 활기
21세기 중국의 앞날에 거대 변수
」
화교의 팽창, 4단계 걸쳐 성장
온라인 바이두백과 ‘화교’조에는 화교 이주의 연혁이 4개 단계로 나뉘어 있다.
▶제1기: 당-송시대(618~1270). 교역의 발전에 따라 동남아 각지에 중국인 거주집단이 형성되었다. 그 총인구는 10여만 명으로 추정된다.
▶제2기: 원-명-청시대(1271~1840). 교역의 증가에 따라 더 많은 중국인이 해외로 진출, 여러 지역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총인구는 100여만 명으로 추정된다.
▶제3기=아편전쟁 이후(1841~1949). 청 왕조가 혼란에 빠지면서 인구의 해외 유출이 격증하는 가운데 동남아의 경제개발이 중요한 출구가 되었다. 화교 인구는 1000만 명을 넘어섰다.
▶제4기=1949년 이후. 화교 인구는 4000만 명 선까지 늘어났고, 아직도 동남아의 비중이 크기는 하지만 미국·캐나다·유럽·오스트레일리아 등 서양 지역의 비중도 크게 자라났다.
이 연혁에서 화교집단의 팽창 속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제1기와 제2기에는 화교집단의 규모가 10배로 커지는 데 600년 전후의 시간이 걸린 반면 제3기에는 100여 년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제1기와 제2기가 끝날 때 중국 인구에 대한 화교의 비율은 0.1~0.2% 수준이었는데 제3기가 끝날 때는 2%를 넘어서 있었고 지금은 3%선에 도달해 있다.
제2기까지(아편전쟁 이전) 동남아 화교 중 다수는 현지인과 결혼해 혼혈 자손을 남겼다. 현지 언어와 문화에 친숙한 이 후손 집단이 오랫동안 화교사회의 주축이었다. 19세기에 신규 이민이 격증하면서 경제적·문화적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서서히 약화하던 이주민사회의 ‘중국성(中國性)’이 거꾸로 강화되는 계기였다.
“중국의 수출품 중 상업적·정치적 가치가 가장 큰 것은 바로 사람들이다. 배마다 화물 외에 부지런한 일꾼 수백 명을 소중한 수입품으로 싣고 온다. 그들은 쿨리나 막노동으로 시작하지만 검소하게 살며 부지런히 일해 약간의 재산을 모은 다음 장사에 투자해 조심스레 키운다. 많은 사람이 나중에는 자기 사업을 가지고 상당한 금액을 중국의 친척들에게 매년 보낼 수 있게 된다.”(스탬포드 래플즈 『자바의 역사』 중. 필립 큔 『타인들 속의 중국인』에서 재인용)
싱가포르 창립자로 이름을 남긴 래플즈(1781~1826)가 1816년에 낸 책의 이런 대목을 보면 제3기 이주 양상은 바이두백과의 구획보다 훨씬 일찍 시작된 것 같다. 1819년 설립된 싱가포르가 ‘화교의 나라’로 발전하는 데는 영국인의 이런 인식이 뒷받침됐을 것이다.
중국과 부쩍 가까워진 근대 화교
화교사회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며 중력의 법칙이 떠오르는 대목이 있다. 우선, 두 물체 사이의 인력이 두 물체의 질량에 비례한다는 점. 화교사회의 ‘중국성’이 일반적으로 잘 지켜지는 것은 중국의 질량이 워낙 크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더 흥미로운 대목은 거리의 제곱에 따라 인력이 줄어드는 ‘제곱 반비례(inverse square)’의 원리다. 중국과 동남아 사이의 실질적 거리가 국제정세의 변화와 교통·통신의 발달에 따라 줄어들면서 교민사회와 본국 사이의 인력이 커진 것이다.
19세기 초까지 동남아 화교 중 본국에 다니는 사람은 상인과 선원 등 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19세기 중엽부터 사정이 바뀌었다. 태평천국의 난 등 전란으로 인한 집단이주가 늘어나고 중국의 개항에 따라 왕래가 쉬워졌다. 제3기(아편전쟁 이후)의 신규 이주자들은 앞선 이주자들에 비해 생활방식을 잘 바꾸지 않았고, 본국의 일에 관심도 많았다.
19세기 말까지 중국의 위기가 깊어지면서 동남아 화교들도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국내에 비해 인력과 자금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쑨원(孫文·1866~1925)이 혁명운동을 위한 지원을 화교사회에서 찾게 된 상황이다.
동남아 화교에게 한 수 배운 쑨원
위인전을 섭렵하던 어린 시절 전혀 ‘위인’답지 않아 보이던 인물 하나가 쑨원이었다. 과대망상증 환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기회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금도 인간적 존경심은 느끼지 않는다. 다만 정치사상으로서 삼민주의(三民主義)의 가치는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삼민주의는 보편타당성을 가진 정치사상은 아니고, 뜻이 명확하지 않은 내용이 많다. 예를 들어 ‘민생(民生)’을 놓고 공산당 쪽에서는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뜻으로 해석해 왔으나 국민당 쪽에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민족’ 사상도 만주족 배척 등 초기의 배타적 종족주의에서 ‘중화민족’ 건설의 대승적 차원으로 나아가기는 했지만 ‘5족협화(五族協和)’ 수준이었다. ‘다민족’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정치사상으로서 삼민주의의 가치는 그 완결성이 아니라 유연성에 있다. 그 유연성은 입력 소스가 다양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쑨원은 소년 시절을 하와이에서 지냈고 일본에서 여러 해 체류했으며, 미국과 유럽을 여행했고 동남아를 아홉 차례나 방문했다. 국내의 활동 지역도 변화가 가장 빠르던 광저우-홍콩 일대였다. 서로 다른 정치적 수요가 제기되고 있던 여러 곳에서 지원과 지지를 호소하는 동안 그 시대의 정치적 과제를 폭넓게 수렴한 결과가 삼민주의로 나타난 것이다.
‘민권’ 사상에서 유연성이 두드러진다. 쑨원은 민권을 백성의 권리인 ‘정권(政權)’과 국가의 권리인 ‘치권(治權)’의 결합으로 보았다. ‘정권’만을 내세우는 근대 민주주의 풍조와 달리 ‘치권’을 나란히 내세운 데서 서양에 맹종하지 않는 현실감각을 느낀다. ‘권위주의’로 많은 비판을 받았던 싱가포르 지도자 리콴유도 여기서 배운 바가 있었을 것이다.
중국 본토의 인구 이동도 한몫
우리가 대개 떠올리는 화교의 모습은 19세기 후반에 빚어진 것이다. 그 이전의 해외 중국인은 ‘중국’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그들의 관심은 거대한 제국보다 자기 고향, 자기 친족에게만 쏠려 있었다.
중화제국은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노백성(老百姓·일반 대중)이 걱정해줄 필요가 없는 막강한 존재였다. 그 힘을 어떻게 피해가고 어떻게 이용할지만이 노백성의 관심사였다. 그런데 19세기 들어 걱정해줄 필요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열강의 침략에 앞서 내부의 구조적 문제가 궤도를 벗어난 것이다.
필립 큔은 『타인들 속의 중국인』(2008)에서 18~19세기 해외 이주의 급증을 그보다 더 큰 국내 이주의 증가에서 파생된 현상으로 해석한다. 쓰촨성 인구가 1722년 230만 명에서 1776년 660만 명으로 늘어나는 과정에서 340만 명의 이주민이 유입한 사실을 예로 든다. 여러 지역 출신 이주민들이 어울린 쓰촨에서는 비밀결사의 큰 역할 등 화교사회의 특징적 현상이 앞서서 나타났다.
중국 인구의 3%, 그들의 막강 파워
19세기에 빚어진 화교의 모습이 지금 다시 바뀌고 있다. 이주 제4기(1949년 이후)의 초기에는 중국의 국제적 고립 때문에 해외 이주가 극히 적었다. 1980년대 이후 해외 이주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 주요 대상지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이다. 미국의 중국인제외법(Chinese Exclusion Act, 1882) 등 19세기 말 이래 서방국의 중국 이민 거부 정책도 이 무렵까지는 철회되어 있었다.
새 이민집단의 주축도 재산가와 전문직 종사자들로 바뀌었다. 지금 중국 인구의 3% 수준인 화교의 문화적·경제적 역량은 인구 비율보다 훨씬 크다. 게다가 교통·통신 수단이 발전하고 중국어가 통일된 21세기 상황에서 화교에게는 중국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칠 잠재력이 있고, 현 정권을 맹목적으로 지지하지도 않는다. 1900년대에 쑨원의 혁명노선이 화교 민심의 수렴으로 성공을 거둔 것처럼, 지금의 중국 지도자들도 국내 민심 못지않게 화교 민심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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