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예술] 대만 고궁박물원의 변모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은 타이베이를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찾아가게 된다. 70만 건이 넘는 소장품에는 궈시(郭熙)의 ‘조춘도’, 황공왕(黃公望)의 ‘부춘산거도’ 등 주옥 같은 회화 작품이 대거 포함돼 있다. 지금까지 고궁박물원은 풍부한 소장품을 근간으로 2006년 ‘대관(大觀)’전, 2011년 ‘산수합벽’전 등 대규모 특별전을 열며 세계의 미술사학자를 대만으로 불러 모으고 문화 교류를 펼쳐왔다.
그리고 최근 수년 동안은 특별전 위주의 방식에서 벗어나 ‘필가묵무(筆歌墨舞, 붓은 노래하고 먹은 춤추네)’전과 ‘거폭(巨幅) 명작’전을 매해 시리즈로 열어 그간 자주 보여주지 않았던 작품들을 교체 전시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두 전시에는 방작(倣作, 후대 화가의 모작)은 물론, 긴 두루마리 그림(卷畵)이 다수 출품되어 소장품의 다양한 면모를 살필 귀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10월 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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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 문명의 보고’ 세계적 명소
특별전→상설전으로 무게 옮겨
자주 보지 못한 명작 교체 전시
대만인의 달라진 정체성 상징
」
전시작 중 남송 승려 화가 파창(法常)의 ‘사생’은 길이 10m가 넘는 권화다. 만물에 불심이 내재한다는 불교적 세계관을 표상한 듯 대파·무·죽순 등 일상 속 소재가 묘사됐다. ‘먹에 5가지 색이 있다’(장언원, 『역대명화기』)는 말을 증명하듯 세심하게 조절된 먹의 농담이 화면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파창의 화법을 모방한 누군가의 방작이지만, 이를 통해 그의 화법은 후대로 전승되었다.
청대 화가 딩관펑(丁觀鵬)이 구카이즈(顧愷之)를 참조해 그린 ‘모구카이즈낙신부’ 역시 길이 5m가 넘는 권화다. 동진(東晉) 구카이즈는 권화 형식의 창시자이자 ‘화성(畫聖)’으로 불리는 대가다. 궁정화가로서 서양화풍을 배웠던 딩관펑은 구카이즈 ‘낙신부도(洛神賦圖)’의 도상을 빌리되 밝은 색채와 입체적 음영을 사용함으로써 고대 명작을 당대에 맞게 재탄생시켰다.
현재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북경의 청나라 황실 수장품이었다. 이 문물들은 1949년 바다를 건너 대만에 오기까지 다사다난한 이동 과정을 거쳐야 했다. 1925년 자금성이 고궁박물원으로 변모해 황실 수장품이 만인에 개방됐지만, 소유권을 둘러싼 황실과 북양군벌, 국민정부 간의 쟁탈전은 계속됐다. 1928년 국민정부는 북벌에 성공해 북경을 접수한 후 문물이 정부의 소유임을 법적으로 공표했다.
그러나 1933년 일본의 산해관 침략을 시작으로 중·일전쟁, 국공내전이 이어지면서 문물은 북경에서 국민정부의 수도 남경(1933)-상해(1935)-남경(1937)-사천성(1939)-남경(1945)-대만(1949)에 이르는 대장정의 길에 오르게 된다. 1933년 국민당은 서화·도자, 도서·문헌 등 1만9492 상자를 기차를 이용해 남경으로 옮겼다. 1935년 문물들은 다시 안전한 상해로 옮겨져 박물관장 마헝(馬衡)의 주도로 검수가 시작됐다. 회화 2254점은 화가 황빈홍(黃賓虹)의 감정으로 진작·방작·위작으로 나뉘어 ‘갑·을·병’으로 분류됐다.
그 사이 남경에 고궁박물원 분관이 완공되자 1937년 5월까지 문물은 다시 남경으로 운반됐다. 그러나 석 달 만에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문물은 공습을 피해 북·중·남 세 노선으로 분산돼 사천성의 아미와 낙산, 귀주성의 안순 3곳에 분산돼 7년간 보관됐다. 회화 작품은 선박으로 낙산에 운반돼 그 지역의 사당 7곳에 분산 보관됐고 국민정부군과 박물원 직원이 상주했다. 낙산의 문물을 책임졌던 오우양다오다(歐陽道達)는 “방습을 위해 서화는 검찰관 입회하에 1941년 5월 27일부터 ‘볕쬐기’를 행했다. 나프탈린과 독일산 크래프트지를 사용해 다시 포장한 후 검찰관이 배석해 상자를 밀봉하고 인장을 찍어 보관했다(『고궁문물피구기』)”고 기록을 남긴다. 그리고 다시 1945년 종전과 함께 흩어졌던 문물들은 남경에 집결됐으나, 국공내전이 시작되면서 패색이 짙어진 국민당은 남경 보관 문물의 4분의 1 정도를 1949년 1월 세 차례에 걸쳐 대만으로 옮겨온다.
고궁박물원 소장품의 이 같은 이력은 소장품에 강한 정치성을 부여했다. 집권당이 교체되고 양안 관계가 부침을 거듭하면서 대륙에서 온 고궁 문물에 대한 시각이 달라진 것도 사실이다.
특별전에서 상설전 위주로 변화된 전시 방식은 어쩌면 그간 ‘중화문명의 보고’이자 ‘정통성’의 상징으로서 문물의 역할을 내려놓는 과정일지 모른다. 국민적 정체성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소장품의 전시 의도를 따라가면서 우리는 대만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발견해 낼 수 있는 듯하다.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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