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형이라는 역사가 쌓아온 오늘의 풍경
Q : 얼마 전 칸에 다녀왔어요. 6년 전에는 영화 〈악녀〉로 ‘필름 페스티벌’을 찾았다면, 이번에는 〈종이달〉을 통한 ‘시리즈 페스티벌’ 참석이었죠. 어떤 에너지를 얻었나요
A : 〈악녀〉로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초청받아 처음으로 칸을 찾았을 때 칸이 주는 에너지가 이런 거구나, 언젠가 다시 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드라마로 가게 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지만요. 함께 열심히 만들어낸 결과물, 고민했던 것에 대한 응원 같아 저는 물론 함께 갔던 모두가 좀 들떴던 것 같아요. 다음에는 경쟁 부문으로 가고 싶어요. 간절히 원하면 이뤄지는 것 같거든요.
Q : 지난 4월 종영한 드라마 〈종이달〉은 동명의 원작 소설과 영화를 토대로 합니다. 영화 〈종이달〉 (2015)을 봤을 때, 곧바로 작품의 판권을 산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고요. 원래 작품을 볼 때 배우 이상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편인가요
A : 나는 나로서 존재해요. 하지만 배우로서 연기할 때는 선택받아야 하죠. 한 작품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면 그 이후에는 비슷한 역이 들어오기도 하고요. 제게는 그게 소위 ‘쎈캐(센 캐릭터)’라고 불리는 역할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잘해내면 그 다음에 다른 기회가 오겠지, 다른 면모가 알려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충실하는 한편, 배우로서 목마름이 생기는 지점이 있었어요. 그때 〈종이달〉을 봤고, 캐릭터가 가진 힘에 동요됐죠.
Q : 그래서 적극적으로 나섰군요
A : 누군가 나에게 이런 역할을 주지 않는다면, 내가 그 선택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유난히 집중한 시기였던 것 같아요. 물론 마음이 그랬다는 것이지 당시의 김서형을 데리고 〈종이달〉을 만들어줄 사람은 없었겠죠. 그동안 제가 열심히 필모그래피를 쌓고, 주인공의 연령대가 높아지면서 지금의 제게 온 것일 수도 있어요.
Q : 스스로 그렇게 느꼈다면 근래 만족감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종이달〉보다 앞서 공개된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에서 문정은 자신의 죽음을 조용히 향해가며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인물이었으니까요
A : 사실 그런 만족감은 저보다 제 주변에서 더 많이 느끼는 것 같기도 해요. 대본도 무척 좋았지만 “왜 좋은 작품에 발을 빼세요?” “뭐든 다 잘 만들어낼 거잖아요” 같은 말에 설득된 부분도 있거든요(웃음).
Q : 7월 개봉을 앞둔 영화 〈비닐하우스〉도 새로운 선택이라는 점에서 그 연장선에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영화 〈도그데이즈〉도 올해 관객을 찾을 예정인데, 확실히 그간 영화에서는 김서형을 보기 힘들었어요. 〈악녀〉 이후가 여학교 교감으로 열연한 〈여고괴담 여섯 번째 이야기: 모교〉(2021)였죠
A : 그러게요. 왜 안 찾아줄까요(웃음)? 게다가 혹평받았어요. 영화를 비판하는 유튜브 영상이 많이 올라왔죠.
Q : 저는 잘 봤습니다. 그런 영상에 ‘이 정도의 말을 들을 작품은 아니다’라는 댓글도 달았고요(웃음). 1980년 광주가 과거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다소 어려워진 면이 있었나 싶어요
A : 저는 그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어요.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언제 어디에서든 사회 문제는 계속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Q : 새삼스럽지만 영화를 향한 김서형의 애정이 궁금해요. 어떤 영화를 좋아하나요? 너무 기초적인 질문이긴 합니다만
A : 전 봐서 좋으면 좋아요. 많이 찾아보지도 않고요. 그래도 굳이 꼽자면 크리스마스 영화들. 〈나 홀로 집에〉 〈러브 액추얼리〉 같은 고전은 당연하고, 채널을 돌리다 배경이 크리스마스인 영화가 나오면 무조건 보게 돼요. 흰 솜을 붙여서 눈을 만든 게 티가 잔뜩 나는 저예산 영화라도 무조건.
Q : 극장에서 영화를 본 최초의 기억은
A : 고등학교 3학년 때 〈프리티 우먼〉을 봤던 게 기억에 남아요. 줄리아 로버츠를 좋아하거든요. 시원하게 웃는 모습도, 〈에린 브로코비치〉를 비롯해 사회 이슈를 다룬 작품에 많이 출연한 행보도 좋았어요. 누군가 영어 이름이 뭐냐고 물으면 그냥 ‘줄리아’라고 대답할 정도로.
Q : 〈비닐하우스〉는 신인 이솔희 감독과 함께한 작업입니다. 작품의 어떤 부분에 끌렸나요? 비닐하우스에 살고,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아들이 소년원에 가 있는 문정이라는 인물은 아주 복잡해 보여서요
A : 저는 항상 대본이 먼저예요. 연기를 보여주고, 그것을 소통하며 해나갈 수 있느냐가 중요하지 독립영화냐, 감독이 경력이 있냐 없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우려가 있다면 문정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이 너무 피폐해질 것 같았다는 것. 하지만 감독님이 직접 겪은 일, 느낀 것을 설명해 주는데 이해가 되더라고요. 이렇게 사는 삶도 있다는 것, 내가 그걸 이해하고 연기한다면 관객도 그 삶을 이해해 줄 것 같은 마음, 그걸 연기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던 것 같아요.
Q : 영화 소개 문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문정에게 예기치 못한 불행이 닥쳐오고, 선의를 지닌 인물들의 삶은 바닥까지 추락한다.’ 그러나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이후 진행된 인터뷰에서 감독은 이 영화를 따뜻한 이야기라고 표현하더군요
A : 그럴 수 있어요. 문정은 요양보호사지만 인간적 면모를 갖고 노인들을 대하고, 그런 문정에게 잘해주려는 노인의 마음까지, 이들이 주고받는 감정선이 단순한 고용관계는 아니거든요. 사람들은 인간 본연의 선의를 따뜻하게 품고 있어도 결국 내 삶을 지키고 살아내야 하기 때문에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결정을 내리기도 해요. 어쩌면 삶을 영위해야 하는 나약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죠.
Q : 극한에 몰렸을 때 자신의 바닥을 보게 된다고 하니까요
A : 설명하기 어려운 영화예요. 아마 영화를 보면 무슨 말인지 바로 아실 텐데, 문정은 〈종이달〉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현실에서도 우리는 살면서 정말 끔찍한 사건사고를 많이 접하잖아요. ‘막장’이라고 일축할 수 있고 그래서 한 편의 코미디 같기도 한 일이 아니라, 어떤 해결과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지금 세상이 원치 않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도 어떤 일이 실재한다면 응원할 수는 없어도 연민은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온 사건을 똑바로 응시할 수는 없어도 그런 이야기를 녹여낸 작업은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요.
Q : 김서형은 이 세상에 어떤 이야기가 더 많아지길 바라나요
A : 지금 세상은 불필요한 자극이 너무 많아요. 예를 들어 저도 회를 먹어요. 그런데 왜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어를 잡는 장면을 내보낼 때, 이미 내장까지 조각났음에도 아직 신경이 남아 있어서 팔딱대는 모습을 굳이 보여주는 걸까요?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가 ‘힐링 드라마’로 소개되는 걸 봤는데, 너무 안타까워요. 얼마나 그런 작품이 없으면 ‘힐링’이라고 표현하나 싶어서요. 20여 년 전 드라마 〈딸 부잣집〉에 출연했을 때는 정말 순수하게 딸이 많은 집 이야기였어요. 지금은 주말 드라마도 그냥 가족 이야기가 아니죠.
Q : 왜 이렇게 됐을까요
A : 사람들이 나약하기 때문에 자극적인 이야기, 속시원하고 극단적인 결말을 원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본성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자극적일 수밖에 없죠. 하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정말 강인하다면, 돈이 되고 시선을 끄는 이야기만 만들까요? 한 번쯤 그런 작품을 만들었다면, 그렇게 번 자본이 순환될 수 있도록 다른 결의 작품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지…. 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이야기에 집중한다고 생각해요.
Q : 솔직히 말하면 오늘 김서형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A : 〈휴먼 카인드〉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요. 절반밖에 읽지 않았는데도 생각이 많아요. 인간 본성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사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이 왜 이렇게까지 됐나 싶거든요. 어쩌면 그냥 요즘 드는 생각들을 털어놓고 싶었나 봐요. 그래서 나는 잘 살고 있냐? 하고 물으면 아니요, 저도 그냥 자극적인 것에 반응하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생각한 바를 실천해야 할 시간에 나를 위한 ‘플렉스’라며 옷 사고, 신발을 사죠. 보세요, 오늘은 텀블러도 안 가지고 왔다니까요.
Q : 텀블러는 저도 두고 왔네요. 변명 같지만 평소에는 잘 갖고 다닙니다(웃음)
A : 촬영장을 가보면 준비해둔 큰 생수병이 만날 남는 거예요. 그래서 왜 이렇게 물을 함부로 먹고 남기냐고, 물병에 먹는 사람 이름 써두고 남으면 가져가라고 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결국 저도 별다를 것 없는 사람이라는 거죠.
Q : 김서형은 여전히 이야기가 가진 힘을 믿나요
A : 메시지가 갖는 힘은 분명 존재해요. 그게 누군가를 꿈꾸게 한다는 것도 알고요. 그러나 30년간 현재진행형으로 연기해 오고 있는 김서형으로서 말하면 이제는 그런 감정이 많이 희석된 상태예요. 내게 주어진 작품과 기회, 캐릭터를 통해 성장하려는 편이죠.
Q : 그럼에도 다음달 스크린 속 당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 관객석에 기꺼이 앉아 있을 사람들이 느끼고 나가길 바라는 게 있다면
A : 내 마음이 피폐해질까 봐 이 작품 출연을 결심하는 게 어렵다고 말했는데요. 그건 이 영화가 치매 환자, 여성 요양보호사, 돌봐줄 자식이 없는 노부부처럼 우리가 당면한 사회 문제에 속한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어느 순간 나도, 내 부모님도 그런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제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연기하는 게 두려웠던 거겠죠. 인생은 고됩니다. 때로는 이미 고된 사람에게 더 고된 일만 생기기도 하고요. 어쩌겠어요? 그런 누군가의 삶을 안타까워할 수 있길, 그에게 좋은 일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을 우리가 가질 수 있길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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