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 배우도 일이 없는 요즘입니다 [배우 김지성 에세이]
1994년 연극으로 데뷔해 영화와 연극, 드라마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배우 김지성의 사는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김지성 기자]
요새 일이 뜸하다. 덕분에 글쓰는 시간은 넉넉히 주어졌지만 생계 배우가 결코 마음 편할 리 있겠는가. 때로는 잠을 설칠 정도로 불안하고, 밑도 끝도 없는 자기 최면을 건다. '결국엔 잘 될 거야...!'
▲ 촬영 현장에서의 모습 |
ⓒ 김지성 |
일이 없을 땐 스스로 루틴을 만들어 일상의 동력을 굴린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글쓰기, 반려견과의 아침 산책과 영어수업 청강, 오전에 집청소와 피아노 레슨, 오후에 다시 피아노 연습, 반려견과의 저녁 산책 후 자기 전 독서 등 자칫 백수가 과로사 할 판이다. 그러나 늙으신 어머니 옆에서 하루하루 쌓여가는 염치의 빚을 어떻게 감당할까.
마치 하늘에서 선물 보따리 떨어지듯 선택받는 것이 우리네 직업이라 일이 없으면 좀 더 치열하지 못해서, 특별하지 못해서, 결국 나로 인해 이런 결과가 비롯된 건 아닌가 하는 자책감으로 아득한 동굴에 스스로를 가두기도 한다.
극작가 체홉의 <바냐 삼촌> 중 소냐의 "일을 해야 해요!"란 대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면 그나마 자력으로 움직였던 일상의 루틴도 '순간 멈춤'이 된다. 시장의 동태를 파악하러 집을 나서니 칼바람에 살이 베이듯 녹록지 않은 현실을 절감한다.
작년에 비해 드라마 제작 편수가 절반으로 줄어버린 데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축소될 것이고, 하루가 멀다하고 기획 단계에서 불발되는 경우가 허다한 상황이라며 저마다 어두운 안색으로 입을 모은다. 고로 지천명이란 삶의 절반을 넘긴 기로에서 현실적인 고민 또한 나날이 커진다. 계속 버틸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멈출 것인가.
만나는 지인들의 얘기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현실적인 조언과 따뜻한 위로. 전자는 객관적인 비교 분석으로 현재 나의 사회적 위치까지 냉정하게 평가해준다. 화자의 언행에 다소 과시욕이 좀 묻어나지만 성공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이유 있는 허세 아닐까.
촌철살인 같은 '팩폭'이 가슴을 후벼 파도 이해는 명쾌하다. 물론 상처 끝에 연고를 발라주듯 잘 될 거란 덕담도 잊지 않는다. 그들 앞에서 내 삶은 보잘 것 없이 느껴지며 주어진 것 안에서 열심히 살아온 나의 진심이 부질없게만 느껴진다.
다시 몇몇의 지인들을 더 만나본다. 이들 역시 현재 얼어붙은 K-드라마 왕국에서 온몸으로 시린 겨울을 버티고 있는 현역들이다. 아이가 둘, 집안의 가장인 동갑내기 배우는 일이 없어 심적고통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되려 술잔을 기울이며 상대를 위로한다. 따뜻한 위로의 치명적인 단점은 듣는 순간 잔뜩 얼어있던 마음에 장작불이 지펴지며 또다시 냉혹한 현실을 망각한다는 것이다.
방송국에서 30년 가까이 근무해온 분장 선생님은 퇴사 후 프리랜서로 전향했다. 그러나 주변의 텃세로 몸과 마음이 심히 손상된 상태에다 일까지 줄었으니 기댈 곳도 마땅치 않다. 그럼에도 당신의 일을 하고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며 여전히 현장을 그리워한다. 소녀같은 초심의 미소에 나도 따라 웃게 된다.
20년 동안 굵직한 필모그래피를 써내려간 캐스팅 디렉터님도 최근 들어 폐업을 생각할 정도로 현 상황의 심각성을 알린다. 이제 고작 40대 중후반, 완생으로 접어드는 절정의 시기에 은퇴를 고민해야 하는 현실이라니.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사무실로 잰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이 마음을 숙연케 한다.
작년에 함께 작업했던 드라마 감독님도 장기간 진행되어온 프로젝트가 답보 상태라 힘든 시간을 묵묵히 견디고 있었다. 다시 현장에서 "레디, 액션!"을 외칠 그 언젠가를 갈망하며, 꼭 버텨서 살아남자고 작은 화이팅을 외친다.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애쓴 우리에게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치열하게 살아왔음을 또렷이 기억한다. 밤낮없는 강행군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아파도 일터를 떠나지 않았다. NG 날까봐 내쉬는 숨소리까지 현장에 바쳐졌다. 그들은 단 한 순간도 나태한 적이 없었다. 더없이 혹독한 시련을 짊어진 와중에도 상대에게 정성을 담아 위로를 건네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당신의 일터에서 이제까지 버틴 건, 당신이 잘해왔기 때문이다."
최근 한 달에 한 편, <오마이뉴스>에 글을 송고할 때마다 제일 먼저 글을 읽는 유지영 편집기자님의 "글이 좋아요!"란 소감 문자는 긴장했던 마음을 쓸어내림과 동시에 막힌 속이 뻥 뚫리듯 후련하다. 기분이 묘해지며 뜻모르게 울컥한 위로도 받는다.
물론 그 말을 다 믿지 않는다. 하루에도 수없이 훌륭한 글들을 접할 텐데 설마 그 정도이겠는가. 그럼에도 오직 예쁜 말만 해준다. 따로 조언은 없다. 남은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하고 써내려간 글이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져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으로 부푼다.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과 또 한번 공감을 나눌 땐 기쁨도 배가 된다.
나는 '인정'을 받아서 기쁜 것이다. 나의 가치를 알아주기를, 기대에 부응하고자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이행한 후 칭찬받고 싶은 마음. 결국엔 바라는 대가도, 물질적 보상도, 사회적 인정도 아닌, 정성을 담아 일구어낸 모든 과정들이 스스로의 긍지로 간직되면 그 뿐. 우리 모두 여느 때보다 인정욕구에 목말라 있다.
지금은 코끝 시린 조언보다 따스한 위안의 온기를 나눌 때이니 부디 위로해주자. 예쁜 말을 나누자. 듣는 순간 상대의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마음까지 울컥해져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지도록. 납덩이처럼 무거웠던 마음의 짐이 탁 내려놔 질 수 있게, 떠오르는 대로 전부 들려주자. 당신이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현장에서 얼마나 빛나는 존재인지. 이도 저도 서툴다면 그저 경청해주길.
새벽에 친언니로부터 낯선 장문의 문자를 받았다. 그리고 맨 마지막 문장. "가족의 응원이 힘이 되었다는 모 여배우의 말에 나도 지금부터 너를 미친듯이 응원하마. 곧 온다." 나는 기대한다. 모두가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따스한 봄을 맞이할 때, 단단하게 쌓아올린 내공이 터질 포텐들을. '진짜가 나타났다!'라며 환호할 어느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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