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1년, 다시 떠오른 '블랙리스트 공포'

하성태 2023. 6. 29.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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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태의 사이드뷰] 곳곳에서 일어나는 검열들... '역사적 교훈' 잊지 말자

[하성태 기자]

 2017년 3월 7일 박근혜 퇴진과 시민정부 구성을 위한 예술행동위원회 등 문화계 시민단체 회원들이 서울 서초구 국정원 정문 앞에서 블랙리스트작성 국가정보원 고발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모습.
ⓒ 이희훈
 
재작년이었나. 몇몇 영화계 지인들로부터 왜 블랙리스트 피해 신고를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 실제 고통 받은 피해자들을 놔두고 딱히 신고까지 할 일이었나 의구심이 들긴 했다. 맞다. 수년 전 개인적으로 연루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떠올리면 개운치가 않고 씁쓸한 감정이 가시질 않는다.

블랙리스트에 관여해 논란에 휩싸인 영화진흥위원회 전 사무국장이 되레 고소를 해왔다. 자신의 이름이 언급된 내 몇몇 칼럼이 본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였다. 봉준호 감독과 일부 영화인단체 대표 등이 고소 당한 바로 그 사건이었다.

뜬금없이, 마포 경찰서에 가서 2시간 가까이 조사를 받았다. 박근혜 블랙리스트와 관련된 몇 개 칼럼에서 단순히 이름 언급했을 뿐이었다. 너무나도 황당한 상황 앞에서 헛웃음만 나왔다. 칼럼 주제가 고소인도 아니었을뿐더러 딱히 개인의 명예를 훼손할 만한 내용도 아니었다.

황당하고 짜증나는 순간들로 기억한다. 그 당시 모든 상황이 그랬다. 기사 자체도 혐의와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 블랙리스트 부역자로 언급된 이가 봉 감독님을 비롯해 블랙리스트 반대에 나선 영화인들을 고소하는 것도 모자라 관련 기사를 작성한 몇몇 기자들을 특정해 엮은 것도 적반하장이 따로 없었던 탓이다. 반년인가 1년 쯤 흘렀을까. 당연하게도, 무혐의 처분이 났다.

벌써 6년여가 지났다. 함께 고소 당한 영화계 선배들과 웃으며 후일담을 나눌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쾌한 감정만은 또렷하다. 어찌보면 큰 피해를 입었다기보다 광범위하게 파생된 블랙리스트의 실상을 일정 정도 당사자로서 경험할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반면 실제 더 크고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피해자들은 씻기 어려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 검열과 블랙리스트란 유령이 다시금 한국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수많은 블랙리스트 피해자들의 비분강개가 들려오는 듯하다.

인천시의 웃지 못 할 '이중 잣대'
 
 인천시의 상영작 리스트 수정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인천여성영화제
ⓒ 인천여성회
 
판단이 극명히 갈렸다. 누구의 판단은 상영불가, 또 다른 이가 판단하면 문제없음. 명백한 이중 잣대다. 판단의 대상은 성소수자 문제를 다룬 다큐 <두 사람>이었고, 판단의 주체는 인천시였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해당 다큐를 두고 최근 논란이 일었다. 이게 간단치가 않아 보인다.

<인천일보> 등 지역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최근 인천시는 19회 인천여성영화제에서 <두 사람>에 대해 상영 제한을 요구했다. 해당 영화제는 지난 2020년부터 올해까지 인천시 보조금 사업에 선정돼 진행 중이었다. 이 같은 시의 요구를 두고 영화제 조직위원회는 "사전검열갑질과 차별행정"이라 규정하며 극렬 반발했고, 각계 시민단체도 기자회견을 통해 뜻을 같이 했다.

이러한 인천시의 영화제 개입 행태는 퇴행적인 성소수자 혐오 논란이라 지탄받을 만하다. 문제는 인천시의 개입이 자의적이라는 데 있다. <두 사람>은 지난 5월 열린 11회 디아스포라영화제에서 두 차례 상영됐다. 디아스포라영화제는 인천광역시가 주최하고, 인천영상위원회가 주관한다.

두 영화제의 차이는 무엇일까. 인천여성영화제는 시의 보조금을 받아 민간인 영화제 조직위원회가 운영한다. 디아스포라영화제는 시장이 이사장을 맡는 인천영상위원회가 개최한다. 이를 두고 인천여성영화제와 관련 시민단체 측은 "(인천시) 여성정책과는 추진 방향 논의 때부터 상영작 리스트 제출을 요구하더니 결국 '퀴어 등 의견이 분분한 소재 제외'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왔다"는 내용의 성명을 내고 해당 공무원의 징계를 요구한 바 있다.

'인천시 주최의 앞선 행사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작품을 인천시 보조금지원사업인 인천여성영화제에서는 문제 삼아 이를 제외시킨다는 것은 행정의 일관성을 상실한 공무원 개인의 일탈행위인 것이다.

이는 행정의 신뢰를 가장 앞장서 세워야 할 고위공무원이 스스로 신뢰를 무너뜨려 인천시에 해당 행위를 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유정복 시장은 행정의 원칙과 질서를 훼손한 여성정책과장에 대해 엄중히 그 책임을 묻고 징계해야 할 것이다.'

인천시가 논란과 비판을 자처한 이러한 웃지 못 할 검열 사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비단 공무원 개인의 일탈행위일까. 아니면 윤석열 정권 1년을 넘기며 만연한 검열의 작동과 블랙리스트의 도래를 우려해야 하는 걸까.

쌓이는 검열, 윤석열 블랙리스트의 도래?

① 불리한 정보 흘리기와 다단계 장치들 ② 직접적인 배제 요구에서 포기 각서까지 ③ 심의위원과 배제 시나리오 사전 협의 ④ 자기검열의 작동과 배제

2021년 김미도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동 방식에 관한 연구-연극계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청와대, 국정원, 문체부, 예술위 등이 긴밀하게 협조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대규모 국가범죄"라 규정하며 그 작동방식을 위와 같이 네 단계로 유형화해 고찰한 바 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크게 네 가지로 규정했지만 세부적으로 이뤄진 블랙리스트의 작동방식은 꽤나 광범위하고 조직적이었던 반면 때때로 공무원 개인의 충성(?) 경쟁이나 일탈에서 비롯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를 기준으로 이번 인천시 여성정책과의 <두 사람> 관련 논란은 직접적인 배제 요구에 해당할 것이다(더 자세한 블랙리스트 사건 관련 피해 내용은 영화진흥위원회 블랙리스트제도개선TF가 2022년 11월 발간한 '블랙리스트 피해인정 연구보고서' 참조). 인천시라는 관이 개입한 블랙리스트의 귀환이라 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사건인 셈이다.
 
 최근 블랙리스트 이후 준비위원회가 선정한 윤석열 정부 1년 검열일지.
ⓒ 블랙리스트이후준비위원회
 
'광범위하다'는 표현이 더 없이 적절해 보인다. 인천시의 경우, 어쩌면 독립영화제, 인권영화제라 주목을 덜 받은 경우라 할 수 있다. 최근 '블랙리스트 이후 준비위원회'가 내놓은 '윤석열 정부 1년 검열일지'를 보면 한숨과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인천시를 포함, 행안부부터 국회 사무처까지 검열과 블랙리스트를 작동시킨 13개 기관, 15개 사례들의 면면이 무척이나 다양하고 다채롭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 취임 당월인 2022년 5월부터 취임 1년을 넘긴 올 6월까지. 가장 크게 논란이 된 '윤석열차' 사건부터 가수 이랑의 부마민주항쟁 기념행사 검열·배제사태까지. 문학·미술·영화·음악·공연·만화·도서·전시 등 명명백백하게 검열이 작동된 문화예술 분야는 말 그대로 전방위라 할 수 있다.

이를 실행한 13개 기관들의 면면 또한 화려하다. 지난해 전주시의 한 예술제 공모 및 부마민주항쟁 기념행사에 관여한 행정안전부와 올 초 2023굿바이전인서울을 검열한 뒤 기습 철거하고 이후 '국회의원회관 회의실 및 로비 사용 내규'에 '전시회를 위한 로비 사용 허가' 조항 신설로 검열을 제도화한 국회 사무처는 2관왕이었다.

'블랙리스트 이후 준비위원회'가 꼽은 15개 검열 사건의 주체에는 이 외에도 광주광역시·EBS·문화체육관광부·용산경찰서·춘천시·대전광역시·서울도서관·대구광역시·예술의전당·인천시·경북 경산시 등이 포함됐다.

고작 1년이다. 윤석열 정권의 임기가 4년이나 남았다. 이쯤 되면, 향후 대한민국 정부부처나 공공기관들은 둘로 나뉠지 모를 일이다. 검열과 블랙리스트를 실행했거나 실행 예정인 부처나 기관으로 말이다. 이처럼 언론 출판에 대한 검열을 반대하는 헌법 21조의 유린이 일상화되는 중이다. 누군가의 자발성을 자양분 삼아서 말이다.

역사의 교훈
 
 2017년 3월 7일 박근혜 퇴진과 시민정부 구성을 위한 예술행동위원회 등 문화계 시민단체 회원들이 서울 서초구 국정원 정문 앞에서 블랙리스트작성 국가정보원 고발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모습.
ⓒ 이희훈
 
검열에 이은 블랙리스트의 작동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파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이미 지난 권위주의 정부시절 이를 처절히 경험했다. 그 작동방식이 피해자를 만들고 실제 공포를 자아내는 것은 바로 자발성에 기인한다.

박근혜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 주범들은 사법처리 대상이었다. 그들의 지시는 일개 서류 속 문구로만 존재했던 경우가 허다하다. 반면 실제 검열은 일선 현장의 주체들이 자발적으로 실행한 과거 사례들이 적지 않다. 박근혜 블랙리스트를 실행했던 그 현장의 주체들은 또 여전히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경우가 다수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러한 검열은 '윤석열차' 사건에서 볼 수 있듯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공모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문화예술인이든, 일반 시민이든 검열이 자기 검열로 발전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자기 검열을 통한 표현의 자유 파괴가 언론 집회의 자유 파괴 즉, 민주주의 파괴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박근혜 정부의 망령인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윤석열 정부 1년 사이 광범위하게 부활했다. 실로 놀랍다. 특히, 지난 14일 국제도서전 개막식장 풍경은 이를 알리는 상징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하필 김건희 여사가 왜'란 질문보단 윤석열 정권이 문화예술인들을 대하는 근본 인식과 태도를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시인이, 작가들이 국제도서전 개막식장에서 무자비하게 끌려 나갔다. 개막 연설에 나선 김건희 여사 경호팀에 의해서였다. 문화예술인들이 정당한 근거 없이 겪은 수모였다. 개막식에 앞서 기자회견에 나섰던 문화예술인들의 요구는 시의적절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계 블랙리스트 실행자라 비판 받는 소설가 오정희가 서울국제도서전 홍보대사로 위촉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리하여, 전선이 확대되는 양상이다. 윤석열 정부 1년, 잠잠해질 만하면 터지는 검열 사건의 피해자인 문화예술인들이, 관련 단체들이 검열과 블랙리스트에 대항해왔다. 여기에, 일부 여당 정치인들이 가세하는 중이다. 

지난 23일, 내홍을 겪고 있는 부산국제영화제를 향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의원들이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BIFF) 이사장의 이념을 거론하며 사퇴를 촉구했다. 여당 의원들이 해당 사태의 본질과 관계없는 때 아닌 색깔론 논란에 불을 지핀 것이다. 이 이사장은 본인은 물론 과거 박근혜 블랙리스트의 상징과도 같같은 <다이빙벨> 사태를 겪은 영화인들이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또 최근 한 여당 의원은 3개 시도교육청을 통해 일선 고교 도서관에 보유 중인 박원순, 손석희,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 등 10명의 인물과 세월호 등 1건의 참사 관련 서적에 대한 자료를 요구했다고 한다(관련 기사 : [단독] 고교에 '박원순' '손석희' '세월호' 책 보유 현황 제출 요구). 자칫 군사독재나 권위주의 정부 시절 횡행했던 불온 서적 리스트를 연상케 한다. 이 역시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사상이나 정치적 검열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적으로 규정한 노조를, 시민단체를 때려잡는다. 현 정부 여당이 지지율을 끌어 올리는 통치술의 일환이다. 그런 윤석열 정부와 여당이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 정권 유지의 손쉬운 방법 중 하나인 검열과 블랙리스트를 가랑비에 옷 젖듯 부활시키는 중이다.

무시무시한 현실은 그런 이에 대한 경각심 자체가 희미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외교와 민생, 경제 등 현안과 관련한 현 정부의 실정이 산적하다. 검열과 블랙리스트, 표현의 자유 관련 논란은 뒷전으로 밀리기 십상이다. 쌓여가는 관련 사건과 이슈에 비해 양적으로 보도도 많지 않다. 보도 양이 적으니 체감 자체가 쉽지 않다.

그러나, 잊지는 말자. 검열과 블랙리스트 사건이 박근혜 정권을 몰락시킨 요인 중 하나였다는 역사의 교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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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해당 기사는 얼룩소 등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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