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현대 '뻔뻔한 징계', 부끄러운 선례 남겼다
[이준목 기자]
▲ 프로축구 울산 현대 소속 정승현(왼쪽부터), 박용우, 이명재, 이규성이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한축구협회 축구회관에서 열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인종차별 논란 관련 상벌위원회에 각각 출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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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말만 요란했지 알맹이는 없었다. 한국축구계에서 사회적 현안에 대한 '기준'이 되어야 할 구단도 연맹도 대표팀도, 모두 '가해자'만 감싸고 사태를 축소시키는 데 급급했다. 이러고도 한국축구계가 앞으로 인종차별 문제에 단호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프로축구 울산 현대의 인종차별 사태가 결국 솜방망이 징계로 마무리되는 분위기다. 울산 구단은 지난 6월 28일 공식채널에 김광국 대표의 이름으로 이번 인종차별 사태에 대한 사과문과 자체 상벌위 결과를 발표했다.
울산은 여기서 그간의 사건 경위와 연맹 상벌위의 판단 및 제재 내용을 고지했다. 그리고 사건에 관여한 구단 팀매니저의 보직 해임과 정승현에 대한 1경기 자체 출전정지, 피해자와 태국 축구계를 대한 사과, 사회적 차별 근절을 위한 재발 방지 교육·캠페인 등을 앞장서서 진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울산은 "구단은 인종, 성별 차이, 장애 여부 등에 따른 모든 차별을 반대하며 평등한 사회를 지향한다. 이번 선수단의 발언으로 상처를 입은 당사자, 관계자, 팬들에게 정중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 사과문에는 정작 가장 중요한 게 빠져있다. 바로 인종차별을 일으킨 가해 당사자들에 대한 '문책'이다. 울산은 SNS에서 인종차별적 언행을 주도했던 박용우, 이명재, 이규성 3인에 대해선 자체적으로 어떤 추가 징계도 내리지 않았다. 반면 직접적으로 인종차별적 언급은 하지 않아서 연맹에서도 징계를 받지 않았던 정승현에게는 1경기 출전정지 제재를 내리는가 하면, 유일하게 선수가 아니었던 매니저만 그나마 보직해임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도대체 기준도 일관성도 찾을 수 없는 울산의 대처다.
알맹이 없는 징계와 문제투성이 사과문
사과문도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문제투성이다. 이미 국·내외에 걸쳐 각종 미디어를 통해 다 밝혀진 가해자들의 실명을 굳이 감췄다. 연맹 상벌위의 징계를 설명하면서는 '선수들이 특정 인종이나 개인을 비하하거나 모욕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며 고의성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부분을 가장 먼저 부각시켰다. 또한 '인종차별 피해자인 사살락에게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내용 곳곳에 어떻게든 가해자들의 책임을 최대한 축소하려는 데만 급급한 듯한 뉘앙스가 역력했다.
울산은 사과문 말미에 '팬들에게 드리는 구단의 사과와 당부'라는 단락에서도 굳이 '연맹 상벌위의 판단 대로 비하나 조롱의 의도가 없다고 하지만'이라는 전제를 붙이고나서 '제 3자에게 오픈되었을 때는 이미 그들만의 대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종-성별차이-장애 여부 등에 따라 누군가에게 상처와 함께 차별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해명했다. 불필요한 사족이자, 사실상 사과보다는 변명에 더 무게가 실린 내용이었다.
울산의 사과문을 뒤집어서 해석하면, 결국 문제가 된 언행이 애초에 인종차별에 해당한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만큼 '무지'했다는 것인데, 이는 그저 가해자의 입장일뿐, 결코 핑계가 될 수 없다. 연맹 상벌위의 결론은 어쨌든 가해자들의 행위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인종차별에 해당한다는 판단을 내린 게 가장 핵심이다. 그런데 이를 슬쩍 비틀어서 고의성이 없었다는 대목을 먼저 강조하기 위하여 연맹의 권위를 끌어들인 것은 더 구차해보인다. 진심어린 사과를 할 때 가장 금기시되는 것이, 잘못을 인정하기전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식으로 자꾸 핑계나 사족을 붙이는 것이다.
어쩌면 울산의 이러한 뻔뻔한 대처는 진작에 예상된 것이기도 했다. 울산 선수들의 인종차별 논란이 불거진 이후, 국내외 팬들의 거듭된 비판과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축구계의 대응은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
프로축구연맹은 여론이 악화되자 일단 해당 가해자들을 상벌위원회에 회부하기는 했다. 1983년 출범한 K리그에서 인종차별과 관련해 상벌위원회가 열린 것은 40년 만에 처음이었다. 하지만 연맹의 결론은 박용우와 이규성, 이명재에게 고작 1경기 출장 정지와 제재금 1500만 원, 울산 구단에 제재금 3000만 원을 부과하는 데 그쳤다.
연맹은 해외 사례를 기준으로 제재 수위를 결정했다고 밝혔지만, 세계 축구계에서도 인종차별의 심각성이 점점 부각되고 있던 상황에서 과연 적절한 제재였는지 대부분의 축구팬들은 공감하지 못했다. 리그 우승을 다투는 빅클럽인 울산 현대 구단의 위상을 고려하여 '봐주기' 처분을 내렸다는 의구심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 패스 공간 찾는 박용우 16일 부산 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열린 축구 국가대표팀 평가전 대한민국과 페루의 경기. 대표팀 박용우가 드리블하며 패스 공간을 찾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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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맹이 인종차별 문제로 내린 첫 징계였던만큼 이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선례'로 남을 수밖에 없다. 대한축구협회도 마찬가지다. 가해자 중 한 명인 박용우는 지난 6월 A매치 기간동안 생애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인종차별 논란을 일으킨 박용우가 나라를 대표하는 태극마크를 다는 게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축구협회는 박용우에 대하여 어떤 처분도 내리지 않았고 심지어 A매치 데뷔전까지 치르게 했다.
심지어 위르겐 클린스만 축구대표팀 감독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선수들이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내가 도울 것"이라며 오히려 가해자인 박용우를 감쌌다. 하지만 실수와 성장 사이에는 '책임과 반성'이라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어야 했다. 잘못된 행동을 저지른 선수도 무조건 감싸겠다는 클린스만 감독의 태도는, 가해자를 보호하고 인종차별을 묵인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는 부적절한 행동이었다. 이는 한 나라를 대표해야 하는 국가대표의 자격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국가대표팀에서도 이런 지경이니 울산 구단도 더욱 눈치를 볼 것이 없었다. 울산 구단이 인종차별 사과문을 올렸던 6월 28일, 울산문수구장에서 열린 2023 FA컵 8강전 제주와의 경기에서, 주전 선수들을 모두 가동한 울산은 가해자 4인방도 모두 정상 출전시켰다.
홍명보 울산 감독은 협회의 1경기 출전정지 징계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박용우, 이규성, 이명재를 모두 선발라인업에 포함시켰고, 심지어 정승현에게는 주장 완장까지 채웠다. 구단이 자체 징계를 내리지 않기로 결정한 만큼 예상된 것이기는 했지만, 최소한의 자숙하는 시늉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실망스럽다. 그저 홈페이지에 올린 사과문 한 장으로 때우고 넘어가려는 울산 구단의 모습은 사과와 반성의 진정성에 의구심을 자아낸다.
한국축구계는 이 사건으로 인종차별에 대하여 대단히 부끄러운 선례를 남기게 됐다. 프로구단에서 대표팀, 연맹까지 잘못을 저지른 선수들에게 제대로 된 처벌과 반성의 기회를 주는 대신, 어떻게든 사태를 축소하고 감싸기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며 과연 인종차별 근절에 대한 의지가 있는지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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