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며 서울을 생각하다]진정한 '걷기 좋은 도시' 되려면
그 위에 주차된 차·쌓인 자재가 걷기 편리성 악영향
고령화로 불편함 호소 더 늘어
보행권 보장 인프라 구축해야
2000년 이후 세계적으로 도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 ‘걷기 좋은 도시’다. ‘걷기 좋은 도시’란 간단히 보면 어느 거점을 중심으로 학교, 병원, 슈퍼, 식당, 대중교통 등 편의시설이 얼마나 가까이에 있느냐로 판단한다. 걸어서 접근 가능한 곳이 많을수록 걷기 좋은 도시다. 미국의 한 웹사이트가 이 정보를 바탕으로 지수를 계산, 순위를 매긴 걷기 좋은 도시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2010년대 초부터는 에어비앤비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식당, 카페뿐만 아니라 독특한 가게가 많은 동네가 관광객들 사이에 걷기 좋은 동네로 알려졌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걷기 좋은 동네로 소문이 나면서 더 ‘힙’해지는 동네의 주택들이 점점 관광객을 위한 숙박업소로 바뀌면서 살던 주민들은 떠나고 관광객으로만 가득 차 동네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는 사례도 많았다. 그런 한편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이른바 과잉 관광(오버투어리즘)과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면서 걷기 좋은 도시의 정의에 물음표가 생기기 시작했다. 소위 ‘걷기 좋은 도시’라고 하는 곳들의 도로와 보도의 물리적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지역의 치안과 환경 상태 관련 정보도 거의 없으며 공공시설과 근린 상업 공간에 대한 자세한 상황도 계산에 포함하지 않아 그저 표면적인 정보일 뿐이라는 비판으로 이어지곤 했다.
2020년대 들어와서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그 여파로 불안해진 국제 정세, 날로 심해지는 기후 변화로 도시에 관한 관심사는 순식간에 달라졌다. 카페가 많은 동네는 멋지고 걷기 좋은 곳이라고 여전히 SNS에서 인기를 끌긴 하지만 확실히 언론은 사회와 환경 변화에 따른 도시의 당면 문제, 즉 인구 감소·범죄 증가·환경 악화 같은 주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를테면 도시의 매력을 재발견하던 2000년대를 시작으로 2010년대의 전성기를 거쳐 이제 2020년대는 도시의 문제에 집중되는 시대가 되었다.
서울은 어떨까? 세계적인 도시로 부상한 서울은 2010년대까지만 해도 오래된 것의 매력을 발산하는 도시 재생에 관심을 두었다. 이미 2000년대부터 걷기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청계천과 경의선 숲길은 그 대표적 사례이며 이 밖에도 외국 언론에서 주목하는 서울 곳곳 자연이 가까운 산책길은 새로운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걷기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서울의 방향은 자연환경과의 소통에 중점을 두어 왔고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이미 공공시설과 근린 상업권의 밀도가 높아서 따로 논의할 필요가 없었다.
이를 거꾸로 보면 지금까지 서울은 걷기 좋은 도시를 위한 방향에 자연이 아닌 사람이 만든 환경, 즉 ‘건조 환경’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거의 모든 사람은 매일 건조 환경 안에서 지내고 있으니 휴식을 위해 찾는 자연환경보다 일상의 삶의 질에 영향을 더 미치는 건 이쪽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건조 환경의 측면에서 서울이 더 걷기 좋은 도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몇 가지 근본적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첫째, 보행로와 자동차의 관계다. 상업 지역을 걷다 보면 보행로에 주차해둔 차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걷는 데 당연히 장애가 되고 사람이 많은 곳은 공간이 줄어들어 매우 불편하다. 큰 도로가 아닌 이면 작은 도로에서 흔히 보게 되는데 특히 노약자에게는 치명적이다. 단속 카메라는 곳곳에 있지만, 사후적인 감시보다는 아예 자동차는 보도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물리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문제는 주택가도 예외는 아니다. 오래된 주택가는 길이 좁아 아예 보도가 없는 경우가 많다. 걸을 때는 길 양쪽 끝에 붙어서 다녀야만 차를 피할 수 있다. 그나마 폭이 조금이라도 확보가 되거나 학교가 있다면 낮은 난간이라도 설치, 보행자 전용 공간을 만든 곳도 있지만, 여전히 충분치 않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 급증한 배달 오토바이를 피하는 것도 매우 불편한 일이다.
상대적으로 아파트 단지는 비교적 도로와 보도 구분이 되어 있긴 하지만 최근 재개발한 단지들과 주변과의 관계를 보면 문제는 여전하다. 아파트로 진입하는 주차장 입구가 큰 도로의 보도 가운데를 관통하기 때문에 출입하는 자동차, 배달차, 오토바이 등은 그 앞을 지나는 보행자에게 걸림돌이 된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보행자와 자동차가 다니는 길을 더 선명하고 안전하게 구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둘째, 도로와 건물 사이의 보도 개선이다. 상업지역은 물론이고 주택가나 아파트단지에서도 바닥이 울퉁불퉁한 보도를 흔히 접할 수 있다. 보도 바닥이 울퉁불퉁하면 걷기 불편하고, 노약자에게는 치명적이다. 비나 눈이 올 때는 미끄러워 다니기 위험할 정도다. 도로보다 보도가 더 높은 상업지는 물론 시내 한복판이나 새로 개발한 지역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문제다. 평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경사가 심한 곳도 있다. 이를 위해 계단을 두어 해결하는 곳도 있는데, 새로 지은 멋진 건물 바로 옆에 불편한 경사를 두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를 해결하려면 새로운 건축 규제를 도입하고, 현재 걷기 어려운 곳은 공적 투자를 통해 평평하게 걷기 쉬운 보도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제는 어찌 보면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걷기 편리성과 안전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므로 삶의 질을 좌우한다. 서울은 건조환경에 사람과 상업지가 밀집되어 양적으로는 분명히 걷기 좋은 도시다. 하지만 보행자와 자동차의 대립 관계와 보도의 물리적 상황을 들여다보면 일상에서 걷기 좋은 도시라기보다는 걷기 힘든 도시에 가깝다. 고령화로 인해 불편을 겪는 주민들은 갈수록 늘어날 테니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겠다.
말하자면 자연환경과의 접근성 면에서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서울은 한 단계 더 나아가 건조 환경에 대한 투자를 늘려야 한다. 걷기 좋은 도시 서울을 더 만끽할 수 있게 준비해야 하는 것은 기본적이고 사소한 인프라의 구축이다. 화려한 구호가 아니라 이것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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