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성의 난데없는 귀국, 당시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황광우 2023. 6. 29.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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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우의 역사산책16] 광주학생운동 주역임에도 서훈 못받아... 관심 필요

[황광우 작가]

일제 치하 36년이 긴 세월인 줄 알았다. 살아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마침내 군부독재의 숨통을 조여갔던 1987년 6월 대항쟁이 올해로 꼭 36년 전의 일이다. "광우야, 마음은 처녀인디 흰머리만 이렇게 나부렀시야"라며 세월의 덧없음을 하소연하던 어머니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머니는 그때 분명 당신의 파릇파릇한 처녀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아우가 치안본부에서 유명을 달리했을 때, 우리는 주먹을 굳게 쥐었다. 그리고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노동자 여러분! 놈들이 또 생사람을 쳐죽였습니다. 김용권 군이 보안대 놈들에게 끌려가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한 끝에 내무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노동자 신호수를 끌고 가 피범벅으로 때려죽인 놈들! 이놈들이 이번에는 나이 어린 여성 노동자 4명을 야산에 끌고 가 집단 강간을 하였습니다. 노동 형제여 떨쳐 일어납시다! 솟구치는 분노로 전국을 휩쓰는 파도로 만듭시다! 살인 정권 타도를 위한 범국민저항운동을 벌여나갑시다!

- 1987.3.8. 살인·강간·고문정권 타도를 위한 노동자투쟁위원회
  
 1987년 6월 10일 항쟁 국민대회. 시위대가 광화문을 향해 행진하며 데모를 벌이자 전경들이 페퍼포그를 발사, 해산시키고 있다.
ⓒ 연합뉴스
  
1987년 대항쟁에서 내가 맡은 임무는 유인물을 제작하고 배포하는 일이었다. 역사연구자들은 한 장의 성명서를 보고 투쟁을 주도하는 세력의 정치 성향과 투쟁 전술을 분석했으나, 유인물의 제작과 배포를 천직으로 삼았던 나는 좀 다르다.

1천 장 내외의 유인물이라면 등사기로 찍는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의 주모자들, 나병식과 김병곤 등은 등사기로 성명서를 찍었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에서 윤상원은 등사기로 투사회보를 찍었다.

하지만 나는 6월 항쟁에서 유인물을 1만 장씩 찍었다. 1만 장은 등사기로 찍을 수 없다. 인쇄기로 찍는다. 이때 '고양의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이냐?'는 운명적 난제가 제기된다. 누가 인쇄소를 섭외할 것이며, 누가 인쇄비를 조달할 것이냐? 어림잡아 아파트 한 채에 달하는 비용이 내 호주머니에서 나갔다.

유인물이 1천 장 내외라면 날쌘돌이 두세 명이 하룻밤이면 배포할 수 있다. 그런데 유인물이 1만 장 내외라면 상황이 다르다. 조직력이 전제되지 않고선, 대량의 유인물을 찍을 수도 없거니와 배포할 수도 없다.  
 
지난 12월 3일 시내 각 학교에는 '조선학생청년대중아 궐기하라'는 격문 수천 매가 배부되었다. 그 배부의 방법이 극히 교묘하여 책상마다 서랍 속에 격문을 넣어 두었다. 격문 작성과 인쇄, 배부의 주범은 장석천 등 10여 명이었다.

배부된 격문은 장석천 등이 사흘 동안 2만 장을 찍어, 그중 수천 매는 시내에 배부하고, 나머지는 평양 대구 등 지방으로 발송하였다. - <동아일보> 1929.12.28 호외
  
지난 칼럼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 장석천 선생이었다는 것, 이 분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으로 전파했다는 것, 이 분이 격문을 제작하고, 배포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됐다. (관련 기사: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댕기머리' 사건으로 일어났다? https://omn.kr/24ce6)

"우리들 선혈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조선의 이익을 위하여 항쟁적 전투에 바쳐라. 단결하여 궐기하라. 광주를 성원하라. 이후의 역사는 우리들의 것이 아니냐."

이 얼마나 심장을 뛰게 하는 선동이냐? 삼천리가 찍도 못하던 압제의 시절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본디 우리의 것이며, 2천 만 조선인이 단결하면 우리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다는 거다. '해방이 바로 옆 방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잖아?' 나는 지금까지 이처럼 명쾌한 혁명적 낙관주의를 만나보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면 안 될 것이 있다. 장석천 선생이 제작하고 배포한 유인물의 수가 2만 장이었다는 거다. 경찰의 발표에 의하면 교실의 책상 속에 교묘하게 배포했다. 장석천 선생이 홍길동의 도술이라도 부렸다는 건가?

그러니까 우리가 만나는 장석천 선생의 행적은 일본 관헌이 작성한 신문조서에 토대한 것임을 전제해야 한다. 조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관헌과 투사는 피 말리는 머리싸움을 한다. 관헌은 범법자를 가능한 많이 잡아내려고 취조하는 것이고, 투사는 동지들을 가능한 적게 축소하고자 한다. 그래서 사건을 혼자 뒤집어쓴다. 동지를 보호하기 위해 독박을 쓰는 것이다.

유인물 제작과 배포에 대해 독박 쓴 장석천 선생이었지만 배후 조직에 대해서만큼은 감출 수 없었나 보다. 일본 경찰은 비밀결사 관련 사실에 대해 추궁했다. 아마도 이 장면에서 살인적인 고문이 자행되었을 것이다.  

서훈받지 못한 독립유공자
 
 1943년 장재성(35) 선생과 부인 박옥희(32), 큰아들 장상백(1)
ⓒ 장재성 기념사업회
 
소화 4년(1929년) 4월 2일경이라고 생각한다. 경성에서 청년총동맹 위원 간담회가 개최되었을 때, 내가 투숙하고 있는 여관에서 차재정과 회합을 하였다. 차재정은 '공산당 및 공산청년회가 거의 검거되었으므로 그 뒤를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전라남도를 책임지어 달라'고 말을 하였다.

나는 그곳에서 전라남도 책임자로 되어 재조직의 임무를 맡을 것을 쾌락하였다. 나는 5월 10일경 광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5월 20일경에 광주청년회관 안에서 장재성을 만나서 이야기해서 가입시켰다. 장재성더러 각 학교에 세포를 조직하고, 학생부의 책임을 지고 조직할 것을 말하였다. - 장석천, 1930.1.5 제5회 신문조서
 
위 신문조서는 역사의 비밀을 보여주고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으로 전파한 조직은 무엇인가? 조선청년총동맹과 조선공산당이었다. 조선청년총동맹은 표면조직이었고, 조선청년총동맹의 의사결정과정을 지휘하는 이면조직은 조선공산당이었다. 위 신문조서에 의하면 1929년 4월 조선공산당 재건 책임자는 차재정이었고, 장석천은 조선공산당 재건의 전남도 책임자였다.

돌아와 장석천은 나승규를 비롯한 주요 활동가들을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전남조직으로 묶어세웠다. 그리고 일본에서 공부에 열중하던 후배, 성진회 창립의 주역, 1928년 동맹휴학투쟁의 지도자 장재성을 광주로 불러들였다.

장재성의 이 난데없는 귀국을 나는 전에 이해할 수 없었다. 유학생이 학업을 완수하지 않고 중도에 귀국한다는 것은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선택이다. 부모님께 낯을 들 수 없는 일이지 않는가? 거기에는 부자지간의 천륜보다 더 강한 동지적 관계가 있었다. 장석천은 조선공산당 전남도 재건위의 학생부를 조직하는 임무를 장재성에게 맡겼다.

며칠 후 6월대항쟁 36주년을 맞이하여 나는 서울로 간다. '살인, 고문, 강간 정권'의 타도를 위해 젊음을 바쳤던 옛 동지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오는 7월 11일이면 광주에서 장재성 선생의 추모식을 갖는다. 선생은 1950년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 이승만의 헌병들에게 붙들려 야산에서 불법 총살을 당했다.

독립은 민주다. 독립이 완결되지 않는 곳에 민주의 완결은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맨 앞에서 싸우신 분, 7년의 세월을 옥중에서 보내신 분 장재성 선생이 아직도 대한민국의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니 나는 이런 논리적 충돌을 마냥 소화하지 못한다. 독자들의 진정 어린 관심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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