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환호 받은 전두환의 정책? 실상은 이렇습니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국가보위 비상대책 상임 위원회 교육 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 방안 발표를 골자로한 '대한뉴스 제1293호' 영상 캡처(1980/8/6) |
ⓒ e영상역사관 |
윤석열 대통령이 "정치는 잘했다"라고 평한 전두환 집권기에 가장 큰 박수를 받은 정책이 '과외 금지 조치'다. 공포심과 정치 불신이 팽배했던 이 시기에도 이것만큼은 환호를 받으며 시행됐다.
전두환 집권기의 사교육 정책은 지금과 똑같지는 않았지만 본질적 면에서는 다를 바 없었다. 교육 정상화를 사교육비 경감으로 달성하려 했다는 점이 비슷하다. 일종의 비상정부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1980년 7월 30일 발표한 정책은 '교육 정상화 및 과열 과외 해소 방안'이었다. 7·30 조치로 약칭된 이 방안은 '과외 금지'를 통해 '교육 정상화'에 도달하겠다는 정책이었다.
그날 신문들에 보도된 국보위 발표문에는 '과열 과외 추방 캠페인을 전개하는 가운데, 공직자 자녀가 과외를 받으면 부모의 공직을 박탈하고, 교사나 교수가 과외 선생이 되면 교직에서 파면하며, 중고등학생이 사설 학원에서 수강하면 학원 인가를 취소하는 등의 조치'가 예고돼 있었다.
그러면서 대입 본고사를 폐지하고 내신 성적과 예비고사만으로 입학하게 하고, 초중고등학교 과목 수를 줄이고 교육 수준을 낮추는 한편, 교육 방송을 확대하는 등의 대안을 제시했다. 또 대학 입학정원을 졸업 정원보다 많게 해서 입시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내용도 담았다. 사교육 열풍을 누그러트리는 동시에 공교육 수준을 일정 정도 낮추는 방향을 제시했던 것이다.
▲ 1979년 11월 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발표하는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
ⓒ 연합뉴스 |
이 시기에 유행했던 말이 '과외 망국'이다. 고액 과외로 위화감이 조성되는 등의 병폐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가계 경제에 끼치는 부담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당시 문교부 산하기관인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과외 실태 조사에 따르면, 1977년의 국가 교육비 총액은 국민총생산(GNP)의 약 8.4%인 1조 2773억 원이고, 그 중에서 학부모 부담액은 8096억 원이었다.
1979년 5월 31일 자 <경향신문> 7면 우상단에 보도된 위 조사 결과에 의하면, 학부모들이 국가 교육비 총액의 63.4%나 부담하게 된 것은 과외비 때문이었다. 학원이나 과외 선생에게 들어가는 돈이 4280억 원이나 됐다. 이것이 7·30 조치의 핵심 명분이 됐다.
박정희가 쓰러진 10·26사태 뒤에 12·12 쿠데타를 성공시켜 군부를 장악하고 이듬해인 1980년에 5·17 쿠데타로 행정부까지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날인 5월 27일에 국보위 설치령을 통과시켰다. 그해 초반의 민주화운동인 '서울의 봄'을 짓누른 데 이어 5월 광주까지 짓밟은 전두환이 국민적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면서, 일시적으로 열렬한 박수를 받게 만든 것이 국보위 명의로 발표한 7·30 조치다.
사실 이 당시는 교육 정책을 논할 만한 시점이 아니었다. 어수선한 정치 상황부터 안정시켜야 할 시국이었다. 또, 전두환 신군부가 교육정책을 다룰 만한 입장도 아니었다. 두 번째 쿠데타로 행정부를 장악하기는 했지만 공식적으로 정권을 인수한 상태가 아니었다. 거기다가 정책 수립과 집행에 필요한 준비 역시 부재했다. 그런데도 백년대계인 교육정책에 섣불리 손을 댔던 것이다.
그런데도, 뜻밖의 사교육비 경감책에 대해 수많은 대중은 환호를 보냈다. 훗날 뉴라이트에 가담하는 이인호 당시 서울대 교수는 1988년 12월 16일 자 <경향신문> 5면 좌상단 기고문에서 "과외 금지 조치는 그 무시무시했던 1980년 여름에 선포되었던 여러 가지 조처 가운데서 거의 유일하게 국민의 호응을 널리 받았던 조처"였다고 평했다.
전두환 집권기에 학생운동으로 인해 탄압을 받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은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신군부가 한 조처 가운데 그나마 대중의 호감을 산 것은 과외 금지와 대입 본고사 폐지, 졸업 정원제를 명분으로 한 대학 입학정원 대폭 확대, 야간통금 해제 정도가 고작이었다"고 기억했다. 운동권 학생의 눈에도 인상적인 정책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 <조선일보> 1981년 8월 18일자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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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과외 금지책은 오래되지 않아 빛을 잃었다. 과외비 부담에서 갑작스레 해방된 듯한 느낌이 들어 열렬히 환호했던 학부모들도 얼마 안 가 하나둘씩 비밀과외 영역으로 넘어갔다. 7·30조치 1년 뒤에 발행된 1981년 8월 19일자 <조선일보> 7면 우상단 기사가 "비밀과외의 성행은 주택가 어디에서나 흘러나오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평했을 정도다.
공교육의 질을 떨어트리는 방향으로 사교육 부담을 경감시켜주려 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환호했던 학부모들도 얼마 안 가 정책에 대한 신뢰를 거두게 됐다. 자녀의 입시를 코앞에 둔 상당수 학부모들은 공교육 수준 여하에 관계없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 급해서라도 비밀과외에 뛰어들었다.
위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학부모들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했다. 수업 장소를 수시로 옮기는 올빼미 과외, 승용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오가며 공부하는 '고속도로 과외'도 등장했다. 과외 교사들이 친척을 가장해 입주 과외를 하는 방식도 성행했다.
쿠데타를 두 번이나 성공시킨 전두환 정권도 비밀과외만큼은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간첩 잡는 공안경찰까지 과외 단속에 투입됐다는 말이 나돌았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1980년에 서울고등지방법원 부장판사였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이회창 회고록> 제1권에서 "포상과 승진으로 과외 위반자 단속을 독려한 결과, 공안 담당의 경찰관까지 과외 금지 위반자를 찾아다닌다는 말이 돌고"라고 회고했다.
비밀과외 현장을 알아내는 것도 힘들지만, 설령 알아낸다 해도 단속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두 명이 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위 <조선일보> 기사는 '우리 아이의 친구나 이웃이 비밀과외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놔둬도 괜찮은 것이냐?'며 언론사에 제보 형식의 신고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한다. 단속의 실상이 이랬기 때문에 '공공연한 비밀'이란 말이 나왔던 것이다.
7·30 뒤에 비밀과외만 성행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타격을 받는 듯했던 사설 학원들은 불과 몇 달 만에 '살길'을 찾아냈다. 대학의 졸업 정원보다 입학 정원을 늘리고 입학생 30%를 중도 탈락시키겠다는 조치에서 해법을 발견한 것이다. 이를 토대로 1981학년도 대학 신입생들의 불안감을 부추겨 이들이 학원 수업을 받도록 만드는 방법이었다.
1981년 3월 12일 자 <조선일보> 7면 좌상단 기사는 "대학 신입생을 상대로 한 새로운 학원 과외가 등장했다"라며 "올 신입생부터 졸업 정원제가 적용돼 성적이 나쁘면 중도 탈락하는 점을 노려 대학별로 1학년 과정 종합반 및 단과반을 설치, 신학기 초부터 많은 학생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7·30 조치는 대학생이 과외 선생이 되는 것은 제약했지만, 대학생이 과외 학생이 될 가능성은 예상하지 못했다. 학원들은 이 틈을 비집고 7·30 조치로 인한 손실을 상당 부분 보충했다. "가까스로 입시 지옥에서 해방된 신입생들이 중도탈락자가 되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학원에 몰림으로써 학원이 제2의 과외 열풍지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들이 교육계에서 나오고 있다고 이 기사는 전했다.
처음에만 열광을 불러일으킨 과외 금지 조치가 결국 실패작이 됐다는 평가는 전두환 정권의 2인자인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서도 나왔다. 정권 초기에 보안사령관과 내무부장관 등을 지낸 그는 <노태우 회고록> 상권에서 과외 금지를 '졸속 정책'으로 평가하면서 이것이 학생운동 참가자의 증가를 유발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학생들의 과외 아르바이트에 타격을 준 것이 이들의 반정부 성향을 더욱 자극했다고 분석했다. "그렇지 않아도 반정부 성향이 강한 데다 이런 졸속 정책이 시행되자 시위 학생들의 수는 급증했다"라고 회고했다.
▲ 2021년 11월 10일 오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은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오월어머니회와 한국대학생진보연합 소속 청년·대학생들의 방문 반대에 가로막혀 묘역 근처에서 참배한 뒤 자리를 나서고 있다. 윤 후보는 이 자리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와 5·18 빼면 정치는 잘했다”는 발언을 한 것에 대한 사과문을 발표했다. |
ⓒ 유성호 |
시간이 들더라도 공교육 개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을 전두환 정권은 사교육비 경감이라는 비교적 수월한 방법으로 이뤄내려 했다. 국가적인 교육 시스템 정비를 통해 이뤄내야 할 일을 부모·학생과 학원을 제약하는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셈이다. 거기다가 공교육의 수준 향상도 담보하지 못했다.
그래서 전두환의 사교육비 경감책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행 직후부터 유명무실해지기 시작한 이 정책은 1987년 6월항쟁으로 전 정권이 타격을 입은 뒤인 1988년부터 폐기 단계로 접어들었다.
1988년 9월 1일 자 <동아일보> 톱 기사는 "대학생 과외와 중고교 재학생의 학원 수강이 허용되는 등 80년 7·30 교육개혁조치 이후 전면 금지됐던 과외가 8년여 만에 내년부터 부분적으로 허용된다"라고 보도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정치는 잘했다'고 평한 전두환의 교육 정치는 그렇게 공식 폐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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