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가 너무 저렴한데, 미리 사둬도 될까요?_돈쓸신잡 #104
5월 한 달 동안 일본을 찾은 외국인은 190만명이다. 그런데 한국인이 이 중 무려 50만명을 차지했다. 최근 도쿄, 오사카에 다녀온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길거리나 상점 어디에서든 한국말이 끊임없이 들린다고 한다.
코로나 기간에 억눌렸던 여행 수요가 폭발했고, 일단 가장 가까운 일본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확 늘었다.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따져도 일본은 현재 매력적인 여행지다. 엔화 가치가 역대급 수준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꼭 여행을 가지 않더라도 향후 엔화 가치가 상승했을 때 차익 실현을 노리며 엔화를 미리 사두는 사람도 많다.
일본 경제는 ' 잃어버린 30년'이라고 불릴 정도로 1990년대에 들어서 장기 저성장과 저물가의 덫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했다. 물론 여전히 전 세계 경제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위상은 막대하긴 했지만, 어쨌든 역동성 측면에선 다소 낡은 국가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오늘날 일본이 나 홀로 막대한 돈을 푸는 이유는 지금이야말로 지긋지긋한 저성장 덫에서 빠져나올 적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움직임 또한 심상치 않다. 현재 반도체 강국 하면 떠오르는 나라는 당연히 대한민국과 대만 그리고 미국이다. 일본은 이 후보에서 제외된 지 오래다. 하지만 1980년대만 해도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장악한 국가는 일본이었다. 미국은 일본의 반도체 기업들 때문에 자국 기업이 막대한 피해를 볼 것이라 판단했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해 일본 반도체 기업들을 고사시켰다. 힘의 논리에 밀린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맥없이 쓰러졌다. 그 공백을 기회로 삼아 반도체 시장에 적극 진출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최근 일본 기업들은 과거의 반도체 영광을 되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전 세계 반도체 기업들에게 막대한 혜택을 주면서 자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도록 투자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대만의 TSMC도, 미국의 마이크론도, 한국의 삼성전자도 일본에 생산시설을 짓기로 결정했다.
최근 전 세계 경제 주요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바로 중국 경제 위기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글로벌 자금이 중국 시장에서 빠르게 이탈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돈이 바로 일본 시장으로 흘러 들어가는 중이다. 일본은 이 기회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엔화 가치를 일부러 떨어뜨리는 중이다. 우리가 현재 일본 여행을 가성비 좋게 갈 수 있게 된 배경엔 위와 같은 상황들이 숨어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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