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밸리 넘는 스타트업, 이게 다르다 [경영전략노트]
‘데스밸리(Death Valley)’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동부, 아마르고사와 페너민트 산맥 사이 250㎞에 달하는 거대한 협곡이다. ‘죽음’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가 붙은 건 거친 산악 지형 때문이 아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더운 곳으로 악명이 높기는 하지만 천연 염전, 모래 언덕, 협곡과 산맥이 어우러진 풍광은 ‘국립공원’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어쩌면 자연이 아닌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데스밸리’라는 단어가 더욱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산업계에서 데스밸리는 ‘초기 사업이 막 작동을 하지만 아직 수익이 없는 기간’을 뜻한다. 사업 수익 모델을 만들었으나 시장에서 돈을 벌기 전이라 자금 사정이 가장 안 좋을 때다. 스타트업 자금 흐름을 그래프로 그리면 계곡처럼 푹 들어간 부분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데스밸리커브(Death Valley Curve)’라고도 부른다.
스타트업이 데스밸리를 넘어 성장세를 이어가기란 만만치 않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국내 창업 기업 5년 차 스타트업 생존율은 29.2%(2020년 기준)다. 10개 중 살아남는 기업이 3개도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심지어 1년 내 사라지는 기업도 25%나 된다.
많은 학자들이 신생 기업의 생존 방식을 연구해왔다. 40년 전 조직 생태계(Organizational Ecology)를 연구한 사회학자 아서 스틴치콤은 방대한 실증연구를 통해 신생 기업이 생존하기 어려운 현실을 두고 ‘신생의 부담(Liability of newness)’이라고 명명했다. 새롭게 등장한 조직이 부딪히는 다양한 어려움을 고려해볼 때 신생 조직이 높은 ‘사멸률’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냈다. 야생의 경제 생태계에서 스타트업이 더욱 살아남기 힘든 현실. 조직 생태계 이론에 근거해 스타트업 생존 방안을 찾아본다.
나태함 경계하고 명확한 원칙
‘대기업의 자본과 기술, 인재를 따라가기 벅차다.’
신생 기업이 고전할 때면 흔히 나오는 틀에 박힌 문구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조직 연구에서도 신생 기업이 대기업보다 자원이 부족하다는 점을 전제로 삼는다. 하지만 신생 기업이 생존하지 못하는 주요 이유를 외부 경쟁이 아닌 내부에서 먼저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준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내부적으로 조직 구성원 간 신뢰가 쌓이지 못했고, 각자 역할이나 작업 루틴이 아직 확실하게 정해지지 못해 조직 역량이 미숙하다는 점이 신생 기업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대기업과 비교해 스타트업이 가장 경계해야 할 문화가 ‘대학 동아리’ 스타일이다. 동아리의 특징은 화기애애함이다. 스타트업은 창업자를 비롯한 소수의 구성원으로 출발한다. 때문에 구성원 간 친밀감은 중요한 덕목 중 하나다. 또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절실하기 때문에 대기업보다는 자율성을 중시하는 문화가 강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른바 ‘형 동생’ 문화는 엄격한 성과주의의 장애물이기도 하다. ‘이 사람을 믿고 할 수 있겠다’는 신뢰가 아니라 ‘이 사람과 함께라면 조금 느슨하게 해도 괜찮겠다’는 나태함이 앞설 수 있어서다. 업무 목표와 성과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고, 실수에 대해서도 맹목적인 온정주의가 작용하는 것은 위험한 신호다.
천장현 머서코리아 부사장은 “회사는 수익과 같은 명확한 목표가 있기에 동아리와는 분명 다르다”며 “비공식적인 문화가 조직의 공식적인 규율을 앞설 때 신생 기업의 위기가 닥친다”고 설명했다.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도 과거 NHN을 ‘조기 축구회’와 비교하며 질타한 적 있다. 평소 차분하고 온화한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은 2012년 “NHN이 편해서 직원들이 회사를 조기 축구회처럼 생각한다”고 언급해 화제가 됐다. 당시 과거 비즈니스 모델에 안주하고 새로운 먹거리를 찾지 못하는 가운데 ‘절박함’을 느끼지 못하는 조직 분위기를 비판한 말이었다.
스타트업의 대표적인 성공 모델로 꼽히는 배달의형제 역시 자율성 못지않게 엄격한 규율을 강조해왔다. 배달의민족 운영사 우아한형제들은 ‘송파구에서 일을 더 잘하는 11가지 방법’이라는 조직 문화를 따른다. 이 가운데 ‘9시 1분은 9시가 아니다’라는 게 첫 번째 원칙이다. 자율성을 추구하지만 작은 약속을 지키는 원칙이 조직을 더 단단하게 한다는 판단에서다.
전문성 발휘할 ‘니치’ 찾아야
샤넬과 유니클로.
의류라는 아이템을 다루는 글로벌 기업이지만, 누구도 둘을 경쟁 상대라고 말하지 않는다. 명품과 가성비 제품, 공략 지점이 서로 달라서다. 기존 경제학에서는 같은 산업에 속한 기업 수가 많아지면 경쟁이 심해진다고 주장한다. 조직 생태학에서는 조직이 생존하고 성장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환경 조건과 자원을 니치(Niche)라고 부른다. 니치는 시장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다. 이 니치가 서로 겹칠 때만 경쟁이 심해진다. 샤넬과 유니클로는 ‘니치 중복’ 정도가 낮아 경쟁 상대가 아니다. 같은 외식 업체라도 피에르가르니에 같은 최고급 프랑스 레스토랑과 맥도날드 같은 대형 패스트푸드가 경쟁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원자재(자원)나 고객군이 크게 달라서다.
이는 스타트업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본인이 경쟁할 ‘니치’를 잘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미 경쟁이 뜨거운 영역에 뛰어들어봤자 승산이 없다. 따라서 스타트업 비즈니스 모델에 맞게 니치 활용도를 정해야 한다.
스타트업은 두 가지 모델 중 선택할 수 있다. 종합주의(Generalism)와 전문주의(Specialism)다. 전문주의는 ‘니치’의 폭을 좁게 잡아 소수의 자원과 시장을 활용한다. 종합주의는 마치 잡식성 동물처럼 폭넓게 니치를 활용한다. 예를 들어 고급 오디오 전문점이라면 전문주의 조직이다. 오디오와 TV, 세탁기 등 전반적인 가전을 다룬다면 종합주의 조직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대기업이 시장을 독점하면 중소기업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자원분할이론(Resource Portining Theory)에 따르면, 소수 대기업이 버티고 있으면 중소 규모 기업이 더 많이 설립된다. 경쟁에서 밀린 대기업 자리를 중소기업이 차지할 수 있어서다. 탄탄한 자동차 브랜드를 중심으로 수많은 협력사가 주변에 자리 잡는 것과 같다.
또한 주로 대기업이 활용하는 종합주의가 전문성을 표방한 신생 기업을 이기는 것도 아니다. 미국에서 단거리 항공사 사우스웨스트(전문주의)가 급성장했다. 이를 누르기 위해 국제·국내 노선을 지배했던 아메리칸항공, 콘티넨탈항공(종합주의)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승자는 사우스웨스트였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종합주의와 전문주의 기업의 활동 범위가 다르고 장단점도 제각각”이라며 “스타트업이 공략해야 할 지점도 여기에 있다”고 밝혔다.
또한 기존 플레이어가 ‘구조적인 관성(Structural Inertia)’에 빠지는 점을 역공할 필요가 있다. “세 살 적 버릇 여든 간다”는 말처럼 개인이 평소에 갖고 있던 행동 방식과 사고방식이 고치기 어렵듯, 기업도 성장 과정에서 유지한 경영 방식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관성을 갖게 된다. 조직이 기존의 방식을 고집하다가는 환경(소비자)으로부터 외면받는 일이 생긴다. 주로 오래된 전통 기업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신생 기업이 치고 들어갈 영역이기도 하다.
(3) 외부와 적극 소통하라
정책 변수 중요…예민하게 챙겨야
‘혁신은 죄가 없다.’
타다가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하자 이재웅 전 쏘카 대표가 한 말이다. 타다 운영사 VCNC는 2018년 운전자가 있는 11인승 승합차를 이용자에게 빌려주는 서비스를 선보였다.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시행령 중 11인승 이상 15인승 이하 승합차를 빌려줄 경우 운전자 알선이 가능하다는 점을 근거로 한 서비스였다. 택시 전반의 불친절 등 소비자 불만을 치고 들어간 전략이었다. 그러나 택시업계 반발에 눈치를 보던 국회는 타다 방식 영업을 금지하는 내용의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타다는 ‘불법 콜택시’ 오명 속에 결국 중단됐다.
타다 사례는 법과 제도(외부 환경 요인)가 기업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신생 기업은 기존의 틀을 깨고 경쟁에 뛰어든다. 당연히 기존 시장을 구축했던 플레이어들이 반발한다.
‘적’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때문에 조직이 속한 ‘무리(Population)’에 영향을 끼치는 법과 제도를 더 철저하게 연구해야 한다. 산업 내 비슷한 모델을 갖춘 플레이어와 소통하는 작업은 필수다.
조석연 클라우드IB인베스트먼트 대체투자본부 부사장은 “스타트업이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사업 모델을 내놨다가 나중에 뒤집히면 기업이 걷잡을 수 없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며 “법과 제도의 변화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민첩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례로 비대면 진료는 정책에 크게 영향받는 영역이다. 보건복지부는 그동안 의료계에서 제기해온 ‘예상되는 우려’가 아닌 ‘실제 데이터’를 기반으로 보완해나가겠다는 방침을 표명했다. 시범 사업 기간에 비대면 진료 이용 데이터를 축적하고, 이를 기반으로 변화를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비대면 진료 신생 기업이라면 이런 변화에 맞춰 모델을 설계해야 한다. 소통 대상은 전방위적이어야 한다. 소비자, 정부, 투자자 등을 폭넓게 포괄한다. 일단 신생 기업으로서 ‘무명의 서러움’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브랜드 알리기에 나서야 한다.
또한 자금 모집에서 외부와의 소통이 중요하다. 바이오 스타트업 A사는 지속적인 투자가 성공의 주요 열쇠다. 그런데 바이오 연구자 출신 CEO는 기술 개발에만 매달리고 자금 마련에 소홀했다. 뒤늦게 투자 유치 전문 CFO를 채용해 소통에 나섰지만 자본 시장은 차갑게 얼어붙은 뒤였다.
CFO는 2년도 안 돼 회사를 떠났고 현재 모기업이 증자에 나서 연구를 이어가는 중이다. 그러나 수익 없이 비용만 지출하는 상황에서 몇 년 뒤 생존을 장담하기 어려운 처지다.
정부와의 소통 역시 중요하다. 특히 정책 자금 활용에서라면 그렇다. 윤석열정부를 비롯해 역대 정부는 예외 없이 스타트업 육성을 표방해왔다. 실제 만만치 않은 공적 자금이 스타트업으로 흘러들어 간다. 일례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2027년까지 7000억원을 과학기술 창업 R&D에 투자해 창업 기업 숫자를 향후 5년간 5500개로 늘린다. 스타트업 경영진이라면 정부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수주해 ‘캐시카우(현금 창출원)’를 만들 필요가 있다.
다만 창업가에게 보조금을 주는 정책에 비판적인 의견이 있다. 정부가 지원하면 창업가의 기업가 정신이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차라리 보조금보다는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줘서 시장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4) 무작정 쿠팡 따라 하기?
‘계획된 적자’ 쉽지 않아…적자 줄여라
‘계획된 적자.’
전자상거래 1위 쿠팡의 전략으로 유명하다. ‘사용자를 많이 모아 기업가치를 올리고, 이를 바탕으로 투자금을 확보, 더 공격적인 투자·마케팅을 벌여 경쟁자를 압도하고, 규모의 경제와 효율화로 흑자를 달성한다’는 모델이다. 한마디로 공격적인 투자로 업계 판도를 뒤흔들고 1등으로 올라서 과실을 얻겠다는 전략이다. 쿠팡은 ‘로켓배송’이라는 핵심 서비스를 안착시키기까지 천문학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실패할 것이라는 우려 섞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올해 1분기까지 3개 분기 연속 영업이익 흑자를 내며 ‘계획된 적자’ 전략이 옳았다는 점을 입증했다.
그러나 쿠팡 전략을 맹목적으로 추종했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다.
수산물 당일 배송 서비스 ‘오늘회’ 운영사 오늘식탁은 40억원 규모의 빚을 갚지 못해 인력 감축에 들어갔다. 모바일 게임 ‘킹스레이드’ 개발사인 ‘베스파’는 대규모 손실과 투자 유치 실패로 회생 절차에 돌입했다. “압도적 1위 주자가 아니라면 투자 유치를 기대하기보다 적자를 줄이는 쪽으로 경영 방식을 줄이는 게 낫다”는 게 유효상 유니콘경영경제연구원장 조언이다.
또한 지나치게 성장만을 강조하는 오류도 피해야 한다. 조직 내에서 혁신과 성장만 부르짖으면 성장률은 잘 나오지만, 조직 내부에서 혼란이 가중되고 정작 생존에 위협을 받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15호 (2023.06.28~2023.07.0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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