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리의 시선]사이다 대통령이 꼭 칭찬은 아니다
내가 지금 보수 정부 아래 사는 게 맞나.
수능을 불과 5개월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 말 한마디가 일으킨 대혼란, 그리고 이걸 수습하겠다며 정부와 여당이 내놓은 번지수 잘못 짚은 과격한 발언을 연이어 접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도한 사교육비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대통령의 문제의식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 말마따나 이 문제를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도 높이 살만하다.
하지만 시기도, 접근 방식도 잘못됐다. 무엇보다 보수 정권답지 않게 시장을 부정하는 듯한 행보 탓에 이 정부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까지 불러일으킨다. 이번 수능 대혼란 국면만 보자면, 이재명식 사이다 행보와 똑 닮았다는 의구심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국민이나 법·시스템은 아랑곳없이 "누구 한 놈만 때려잡자"며 근본적 해결책 없이 일단 지르고 봤던 그 행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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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킬러 문항' 콕 집어 문제 제기
과격 용어로 일타강사 악마화
갈등만 키우고 해법은 멀어져
」
잠시 복기해보자. 지난 15일 교육부 업무 보고에서 윤 대통령이 이주호 교육부 장관에게 한 발언이 전해지면서 수험생과 학부모는 대혼란에 빠졌다. 대통령은 콕 집어 '킬러 문항', 더 정확히는 언어 영역의 킬러 문항에 죄를 물었다. "과도한 배경지식을 요구하거나 대학 전공 수준의 비문학 문항 등을 출제하면 무조건 사교육에 의존하라는 것. " 범인도 지목했다. "교육 당국과 사교육 산업이 한편(카르텔). " 당장 손쉬운 희생양도 만들었다. 대입 담당인 교육부 인재정책기획관을 임명 6개월 만에 문책성으로 경질했다. 또 수능 출제를 담당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에 대한 감사 방침을 밝혔고, 19일 이규민 평가원장 사임으로 이어졌다. 20일엔 국무조정실이 교육부와 평가원에 대한 복무 감사에 착수했다.
대통령실이 아무리 "대통령 지시는 (수능 난이도가 아니라) 사교육 개혁과 공정한 입시에 방점이 있고, 이미 지난 3월 지시했으나 이행되지 않았다"고 강변해도 소용없었다. 그간 밀실에서 무슨 논의가 오갔든 국민 입장에선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였고, 논란은 커져만 갔다. 6월 1일 실시한 모의평가(6모) 채점 결과(27일)가 나오기도 전에 벌어진 일들이다.
결국 사교육비 경감이라는 큰 틀의 국민적 공감대는 사라지고 킬러 문항이나 카르텔을 둘러싼 불필요한 논쟁과 갈등만 촉발됐다. 야당으로선 저절로 굴러온 호재였다.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의 "입시 공정성을 지탱하는 큰 기둥인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발언은 비록 야당 입에서 나왔지만 충분히 새겨들 할만한 비판이었다.
하지만 국민의힘 의원들은 귀를 막고 다른 길을 찾았다. 사교육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뿐인 사교육업체 일타강사 악마화에 나선 것이다. 이철규 국민의힘 사무총장은 "연 수입 100억, 200억원이 공정한 시장가격이냐"며 "불특정 다수에게 피해를 주면서 그 피해를 바탕으로 초과이익을 취하는 것은 범죄이고 사회악"이라고 주장했다. 돈 많이 벌면 범죄자라는 주장도 놀랍지만, 이런 반시장적인 발언이 민주당도 아니고 국민의힘에서 나왔다는 게 충격적이다.
여기서부터는 충격보다는 예측 가능한 수순으로 가고 있다. 국세청은 28일 스타강사가 포진한 메가스터디와 최근 의대 정시 입시로 급성장한 시대인재 등 사교육업체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앞서 이주호 장관은 "사교육 이권 카르텔 등 학원 부조리 집중신고 기간을 운영한다"고 밝혔고, 대통령실 관계자도 "(사교육 이권 카르텔에) 사법적 조치가 필요하다면 고려할 수 있다"고 했다.
좀 과장하자면 대통령 한마디에 온 나라가 지금 일타강사와 사교육업체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왜 공교육이 사교육의 경쟁력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지에 대한 각성은 어디에도 없다. 교육부는 지난 26일 킬러 문항 26개를 공개했는데, EBS 교재 지문을 담은 문항도 있어 오히려 혼선을 일으켰다. 게다가 바로 다음 날인 27일 나온 6모 채점 결과는 당초 대통령실이 언급한 언어 영역은 오히려 최근 8년간 가장 쉬웠던 것으로 드러나, 교육 당국에 대한 불신만 키웠다.
이런 투박한 사교육 때리기는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마저 등 돌리게 한다. 갑작스러운 수능 방향 전환은 학부모 불안 심리를 키워 사교육 수요만 더 키운다. 그리고 정보력과 경제력 있는 계층이 유리해진다. 현장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정부 여당엔 이 쉬운 상식이 통하지 않나 보다. 마치 코로나 19가 발병하면 신천지부터 때려잡고(대법 무죄), 개고기가 문제면 법상 단속 근거가 없어도 일단 시설부터 폐쇄하며 '사이다'로 불렸던 과거의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보는 느낌이다. 아마 적잖은 국민이 그런 사이다 행보가 불안해 윤석열 대통령을 뽑았을 텐데 말이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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