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백조의 호수’ 모멘트
‘백조의 호수’는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대표작이다. 희고 나풀거리는 튀튀 스커트, 우아한 헤어 밴드와 토슈즈 등으로 꾸민 오데트 공주의 청순하고 가냘픈 모습은 ‘발레리나의 전형’으로 꼽힌다. 사악한 저주에 걸려 낮엔 백조, 밤엔 인간으로 살아가는 오데트를 구할 유일한 방법은 사랑의 맹세를 받는 것. 어느 날 지크프리트 왕자가 백조 사냥에 나섰다 사람으로 변한 오데트를 발견하고 사랑에 빠진다. 다음날 무도회장에서 청혼하기로 약속한 왕자는 다른 여인에게 사랑을 맹세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 작품의 특징은 여러 버전의 결말이다. 초판에선 오데트와 왕자가 함께 죽음을 택한 뒤 저승에서 재결합한다. 연출자에 따라 오데트와 왕자가 악당을 물리치는 해피엔딩, 왕자의 눈앞에서 오데트가 악당에게 잡혀가는 새드엔딩 등 다양하게 변주됐다. 아예 근육질 남자 무용수를 백조로 등장시키거나, 오데트를 환경운동가로 각색한 작품도 찬사받았다.
러시아에선 ‘백조의 호수’가 특별한 시그널로도 쓰인다. 1982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주네프가 사망하자 국영TV에선 부고 대신 일제히 ‘백조의 호수’ 발레 장면을 송출했다. 84년 유리 안드로포프, 85년 콘스탄틴 체르넨코 사망 때도 마찬가지였다. 91년 8월 고르바초프 정권 때 쿠데타가 일어나자 TV에선 또 ‘백조의 호수’가 흘러나왔다. 러시아인에게 이 작품은 최고 지도자의 서거·실각 등 정치적 대격변을 뜻한다.
최근엔 ‘푸틴의 죽음’을 염원하는 상징으로 쓰인다. 개전 직후인 지난해 3월, 러시아 독립방송국 도즈디TV는 정부 탄압에 사업 중단을 선언했다. 직원들은 뉴스룸에 모여 “반전”을 외친 뒤 마지막으로 ‘백조의 호수’를 내보냈다. 러시아 독립신문 노바야 가제타는 1면에 ‘버섯구름 앞에 춤추는 4명의 발레리나’ 이미지를 실었다. 우크라이나 폐허 속 발레하는 소녀 벽화도 같은 의미다.
24일(현지시간) 바그너그룹 수장 프리고진의 반란에 서방 언론은 “드디어 푸틴의 ‘백조의 호수’ 모멘트가 도래한 것이냐”라고 전했다. 민간 군사전문가 집단 지오컨펌드는 “러시아TV의 ‘백조의 호수’ 방영은 아직이냐”며 성화였다. 러시아 국영TV가 과연 어떤 결말의 ‘백조의 호수’ 영상을 준비해뒀을지 궁금해진다.
박형수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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