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룡의 신 영웅전] 가슴이 넓었던 황희 정승
황희(1363~1452) 정승은 인복을 타고난 분이었다. 그가 세종을 주군으로 모시지 않았더라도 명재상이 될 수 있었을까. 황희는 인간적 허물도 있었지만 세종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무겁게 썼다.
어느 날 황희가 마당을 거니는데 문득 어느 하인이 땅바닥에 꼬꾸라져 죽는시늉을 했다. 곁에 있던 녀석에게 “왜 저러느냐”고 물었더니 평소 속앓이가 있어 저런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황희는 “그런 병이라면 나에게 좋은 약이 있지” 하면서 먹던 약을 내주었다. 약을 받아든 하인은 감히 영의정이 드시던 약을 먹을 수가 없어 약방에 내다 팔아 그 돈으로 병도 고치고 친구들과 술도 거나하게 마셨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다른 녀석이 또 황희 대감 앞에서 죽는시늉을 했다. 역시 능청스럽게 속앓이가 있어 저렇다고 아뢰었다. 그 말을 들은 황희는 자기의 약을 또 내주었다. 하인들은 그 약을 팔아 푸짐하게 한 상 차려 먹었다.
다시 잊을 만하니까 이번에는 다른 녀석이 대감 앞에서 또 죽는시늉을 했다. 이번에도 약을 내주었다. 그 녀석들이 약을 받아들고 물러가자 곁에 있던 황희의 아들이 “아무래도 저 녀석들이 꾀병으로 아버님을 속이는 것 같다”고 아뢰었다. 그 말을 들은 황희는 아들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어차피 그 약은 아픈 사람의 입으로 들어갔을 텐데 그러면 잘된 일 아니겠니.”
요즘 같은 세태에 황희 정승의 호 방촌(厖村)처럼 가슴이 넓은 사람이 그립다. 이 나라의 정치는 골목에서 딱지치기하다가 싸우는 애들만도 못하다. 가슴 넓게 껴안고 보듬으며 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훈훈할까.
도무지 사람 냄새 나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아프리카 소말리아도 이렇지는 않다. 우리가 박복해 황희 같은 인물을 못 만난 것인지, 이런 세상이 싫어 그런 분들이 숨은 것인지, 그도 아니면 우리가 제 발등을 찍은 것인지. 참 야속하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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