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조 백일장 - 6월 수상작] 자신만의 영혼으로, 열정을 노래하다

2023. 6. 29.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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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블루로즈
블루로즈
이영미

예외를 바라는 게 파렴치한 일일까
수많은 인연들을 남김없이 보내놓고
한 사람 가슴 깊숙이
숨겨두고 싶은 나는,

불덩이 가라앉힌 푸른 빛 비밀 하나
있을 수 없는 일은 은연중에 생기기에
숨 쉬는 하루하루가
열망으로 가득 차

누구는 흑백으로 읽어야 맞다 하고
바라지 말아야 할 꽃이라 어르지만
어느새 짙푸른 휘장 속
나도 몰래 벙그는

■ ◆이영미

이영미

충남 연기 출생. 2021년 ‘패각’으로 에세이문예 수필 신인상 수상. 2022년 시 ‘목어’로 제28회 지용신인문학상 수상. 2022년 9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차상


9호선 승강장에서
김정란

스크린 도어에서 나부끼는 詩(시)꼴은
표정 없는 입과 눈, 살짝 건드리고
유리에 비치는 의미
넌지시 일러준다

전광판에 흐르는 샛강역도 이와 같아
나무배 잡아타고 버들처럼 떠가는데
졸음도 꿈이 되는지
물길은 끊어지고

자꾸만 불러봐도 차오르지 않는 가슴
다시 말해 시 한 편 잘 쓰고 싶은 것
아니면 내가 시가 되어
철로 위에 사는 것


차하


담쟁이
장훈

말씀의 붉은 경을 돌담에서 읽는다
단란한 햇볕으로 푸른 날개 말리며
줄지어 소풍을 가듯 하늘길을 오른다

닫혀있는 담벼락에 푸른 밑줄 그으며
늦는 시월 단풍을 데불고 가는 잎새
가을의 문에 기대어 벼랑 하나 넘는다


이달의 심사평


녹음이 웅숭깊은 6월이다. 이번 응모작들은 대체로 수준이 높은 작품들이 많아 심사에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음보가 불안하고 고투와 한자를 사용한 작품들이 보였다. 시조는 정형시이며 민족 고유의 문학 형식이라는 전통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정형성이라는 공통의 신체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자신만의 고유한 영혼으로 노래할 것인가”를 화두로 삼고 있다. 작품에 한자어를 쓴다든지 고시조에서나 쓸법한 어투를 쓴다든지, 종장의 음보가 불안하면 심사에서 제일 먼저 제외될 수밖에 없다.

이번 달 장원으로 이영미의 ‘블루 로즈’를 선한다. 푸른 장미를 “불덩이 가라앉힌 푸른 빛 비밀 하나” 잘 형상화했다. “한 사람”을 가슴 깊숙이 숨겨두고 싶은 열망을 종장의 “어느새 짙푸른 휘장 속/나도 몰래 벙그는”이라는 상상력으로 종결의 의미를 잘 살린 수작이다. 시인의 개성이 돋보였다. 같이 보내온 작품들 중 어느 것을 선해도 좋았음을 알린다.

차상으로는 김정란의 ‘9호선 승강장에서’를 올린다. 둘째 수의 비유적 표현이 이 작품을 돋보이게 했다. 사용한 시어들도 구체성을 띄고 있어 시인의 의도가 잘 드러나 있고 전체적인 구성도 좋았다. ‘벽화가 있는 골목’도 함께 올려도 무방한 작품이었다.

차하는 장훈의 ‘담쟁이’를 올린다. 첫 행의 “말씀의 붉은 경을 돌담에서 읽는다”가 선명하게 와 닿았다. 담쟁이를 소재로 할 때는 시인의 독특한 개성이 드러나야 한다. 너무 흔한 소재는 웬만해선 눈에 띄지 않는다. 이미 좋은 작품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강영록·유인상 두 분의 작품도 끝까지 겨루었음을 알린다.

심사위원 정혜숙·손영희(대표집필)


초대시조


내 생각은-지렁이
김수엽

자신의 무게만큼
이 땅에 길을 만들며
밟지 마, 발밑에서
꿈틀거리는 항변
온 몸에 모래를 묻혀
세상을 비튼다
그는 그림자를
만들지 못 한다
높이 또는 깊이를
알지 못하는 몰골
땅 속에 둥지를 트는 일
그 하나가 좌우명

■ ◆김수엽

김수엽

1991년 중앙일보 연말 장원, 199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집 『등으로는 안을 수 없다』. 2023년 성파시조문학상 대상. 역류·율격 동인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라는 속담 때문일까. 지렁이는 아무렇게나 밟아도 되는 존재로만 여겨진다. 너무 순하고 너무 연해서 만만하게 보이고 하찮게 보이는 걸까. 알고 보면 지렁이는 꿀벌이 그렇듯이 생태계를 이어가게 하는 보물 같은 동물이다. 먹이사슬에서 최하위층에 속해 있어 세상이 다 그들의 천적이지만 꿈틀꿈틀 눈이 없어도 고맙게 살아주어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준다. 흙 속의 유기물을 먹고 배출하는 과정에서 건강한 땅이 되는 천연 비료 ‘분변토’가 나오는 까닭이다. 또 그들이 파놓은 땅 속 작은 굴은 저수지 역할을 해주어 많은 비가 내릴 때 생기는 토사 유출이나 크게는 산사태까지도 막아준다. 땅은, 사람들은, 지렁이에 기대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지렁이는 무지렁이 같은 이미지에 갇혀 있다.

시인은 그런 지렁이를 따스하게 바라본다. 늘 땅 속에 살고 있어 “그림자를/ 만들지 못”하고 “높이 또는 깊이를/ 알지 못하는 몰골”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에게도 “좌우명”이 있다고 말한다. 좌우명이란 늘 옆에 두고 가르침으로 삼는 말이나 글, 또는 이루고 싶은 목표나 의의를 나타내는 것. 그들에게 그것은 “땅 속에 둥지를 트는 일”인 것이다. 그들도 땅속에 집을 짓고 살고 싶은 것이다. 지렁이는 한 번도 집을 지어보지는 못했지만 짓겠다는 목표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거 하나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지렁이 자리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의 ‘무지렁이’를 넣어서 읽어보니 딱 들어맞는다. 한 부분을 잘라버린다는 뜻의 동사 ‘무지르다’가 만든 말 ‘무지렁이’는 지렁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도 어쩐지 둘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 같다. 이들도 거의가 순진하고 순박하다. 그런데 일부 약삭빠른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세상 물정 모른다며 쉽고 만만하게 본다. 이들을 밟고 오르려 한다. 순수한 이 사람들이 세상을 귀하고 아름답게 만들고 있는데도 말이다.

“밟지 마”. 이 항변을 윤기 나는 6월의 신록과 싱싱한 남새밭 푸성귀들 앞에서 따라해 본다.

강현덕 시조시인

■ ◆응모안내

「 매달 20일까지 중앙 시조의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 할 수 있습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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