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먹는 전기차 급증… 올 여름 블랙아웃 진앙지 되나
수도권 대규모 정전 사태 우려
“전기차 1대를 5∼6번 충전하면
4인 가구 한 달 전력량과 비슷”
극심한 폭염으로 지구촌이 몸살을 앓고 있다.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전력 수요가 급증하며 정전도 잇따른다. 최고 기온 44도에 이르는 베트남에선 수도 하노이와 북부 공단지역을 중심으로 정전 사태가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이에 베트남 정부는 국영 베트남전력공사(EVN) 감사에 돌입하고 원인 파악과 책임소재 규명에 나섰다. 베트남에서 스마트폰 공장을 운영하는 삼성전자까지 예비전력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매년 여름마다 전력난에 신음하는 건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난 2011년 블랙아웃(대규모 정전) 이후 여름철 예비전력비율 10%를 사수하기 위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다. 특히 올 여름은 유례없는 무더위를 예고한다. 정부와 공공기관은 물론 산업계도 사무실 적정온도 유지, 설비 공회전 감축 등 ‘에너지 절약’ 모드에 들어갔다.
전기 부족을 걱정하는 상황에서 전기차·배터리 업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선 ‘제2 블랙아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수도권 일대에서 대규모 정전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막대한 전기를 필요로 하는 전기차·데이터센터가 블랙아웃의 진앙지가 될 수 있다고 진단한다.
SK증권 리서치센터는 최근 ‘에너지 패러다임의 변화’ 보고서를 내고 “전기 먹는 하마인 전기차가 늘어나면서 올 여름 블랙아웃 공포가 확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기차의 배터리 용량은 통상 70킬로와트시(kWh) 안팎이다. 현대차 아이오닉6의 경우 1회 충전(53.0~77.4kWh)으로 367~524㎞를 주행할 수 있다. 한국 4인 가구의 월평균 전기사용량은 약 307kWh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1대를 5, 6번 충전하면 4인 가구가 한 달에 쓰는 전력량과 비슷한 셈”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전기차 판매 대수는 2020년 4만6900대에서 지난해 16만2980대로 치솟았다. 지난해 기준으로 전기차 등록 대수는 39만대로 전년 대비 68% 늘었다. 신차 중 전기차 비중인 ‘전기차 침투율’은 현재 중국 20%, 미국·유럽연합(EU) 10%, 한국 8% 안팎으로 추산된다. 에너지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는 오는 2035년에 전 세계적으로 전기차 판매 대수가 8000만대를 기록할 것으로 추정한다. 전기차 침투율도 약 90%까지 뛸 것으로 전망했다. 약 12년 뒤 신차 대부분은 전기차라는 예측이다.
하지만 전기차 시대가 열리더라도 ‘전력 인프라’가 장애물로 작용한다는 우려가 크다. 전기차 충전소 뿐만 아니라 도심 곳곳에 전기를 공급할 송전망이 모자라 ‘전력 부족’ 사태를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승두 SK증권 연구원은 “1000세대가 함께 사는 아파트에서 모두 전기차를 이용한다고 가정하고, 동시에 퇴근 후 전기차를 충전한다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실 전기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발전 전력량은 매년 늘고 있다. 한국전력통계에 따르면 수력·원자력·신재생 등을 모두 포괄한 발전량은 2020년 552테라와트시(TWh)에서 지난해 594TWh로 늘었다. 송·배전 손실률은 3.5% 안팎으로 일본(5%), 미국(6%)보다 안정적이다.
문제는 지역별 ‘전력 불일치 현상’에 있다. 전기차와 반도체·데이터센터 같은 첨단산업 설비는 대부분 수도권에 몰려있다. 반면 전력을 생산하는 원전·재생에너지 시설 등은 영호남과 제주에 밀집한 상태다. 지역에서 만든 전력을 수도권으로 전달할 송전선로가 부족해 한 쪽은 전기가 모자라고, 다른 쪽은 남아도는 일이 벌어진다.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은 제주도는 전력을 소비하지 못해 발전소에 ‘출력 제한’을 거는 경우가 2021년 65회에서 지난해 132회로 늘었다. 제주 일대 태양광 발전 사업자들은 출력 제한 조치를 막아 달라는 행정소송까지 제기했다.
이런 전력 수요·공급 불일치를 해소하려면 송전선로를 깔아야 한다. 수조원이 넘는 막대한 예산은 걸림돌이다. 수도권 송전망 확충에도 역시 천문학적 자금이 필요하다. 단기간에 확충하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천영길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정책실장은 지난 4월 한전·전력거래소, 민간 전문가들과 가진 ‘전력망 혁신 태스크포스(TF)’ 첫 회의에서 “전력망 보강 수요가 대폭 늘고 있지만 한전의 재무 상황, 사회적 수용성 등 대내외적 여건이 녹록치 않다”고 말했다.
전기차가 빠르게 늘고 있는 미국도 비슷하다. 미국 연료전지 기업 블룸에너지는 올해 1분기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디지털, 인공지능(AI) 등 모든 영역에서 전기 사용이 늘어나면서 전기를 전달하는 것에 있어 전례 없는 문제가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감당할 대안으로 ‘분산에너지’ 활성화가 거론된다. 지역에서 생산한 전기를 수도권으로 송전할 송전선로 건설이 단기간에 쉽지 않다면, 지역별로 수요를 충족할 태양광·수소·에너지 저장 시스템(ESS)과 같은 분산형 전원을 확대하는 것이다. 태양광 발전 등으로 가정에서 자체적으로 전력을 생산하고 ESS로 남는 전력을 저장해 필요한 시기에 사용하는 방안이다.
정부는 올해부터 2027년까지 ‘제3차 지능형전력망 기본계획’을 통해 약 3조6531억원을 전력 공급 유연화, 분산에너지 지원 등에 투입할 방침이다. 지난해 13.2%였던 분산형 전원 발전 비중도 2027년 18.6%까지 끌어올리기로 했다.
전기차를 ESS와 같은 분산형 전원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전기차가 단순히 전력을 소비하는 장치를 넘어 외부로 전력을 제공하는 ‘V2G’(Vehicle-to-Grid·자동차전력망 연동기술) 역할로 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성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25년 이후 판매되는 전기차 및 충전시설에 V2G를 위한 양방향 충전 기술을 의무적으로 탑재하도록 하는 내용의 환경친화적자동차법 개정안을 최근 발의했다. 전기차가 ‘이동형 ESS’ 역할을 하며 도심 내 전력 수급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다. 유지웅·전혜영 다올투자증권 연구원은 “전기차 배터리에 저장된 에너지를 외부로 반출해 차량 소유자는 보유 비용을 줄이고, 전기차와 전력망 간의 생태계 형성도 빨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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