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방식으론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 않는다 [소셜 코리아]

이윤영 2023. 6. 28.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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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코리아] 인간의 숭고함 이야기한 루이스 세풀베다... 존엄 위해 투쟁하는 자세에서 희망 발견

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말>

[이윤영]

 23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들. 국민의힘과 정부는 이날 국회 원내대책회의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킬러 문항을 '핀셋 제거'하고, 유아 사교육비 절감을 위해 만 3∼5세 교육과정 개정도 추진하기로 했다.
ⓒ 연합뉴스
최근 사교육 문제가 새삼스럽게 화두다. 하루하루가 급변하는 시대인데, 교육 문제는 늘 제자리걸음이다. 팬데믹이 초래한 교육 불평등과 지역 격차, 입시 위주의 경쟁식 교육, 청소년의 우울과 자살까지. 점점 더 나빠지는 상황 앞에 매번 내놓는 대책은 똑같다. 수능을 쉽게 내느냐 어렵게 내느냐, 정시와 수시 중 무엇을 강화하느냐, 혹은 몇몇 해외 제도를 수입할 것이냐 등 지극히 식상하고 낡은 방식 말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는 더 이상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교육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 이런 순간에는 특히 회의감이 몰려온다. 또 점점 더 수렁으로 빠지는 것 같은 문제 앞에서 무기력해진다.

그런데 그런 쉬운 포기는 비겁한 것이라고 일침을 가하는 소설을 하나 읽었다. 칠레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의 자전적 소설 <세상 끝의 세상>이다. 교육 문제를 생각하며 이 책이 떠오른 것은 이 책 자체라기보다 소설 덕분에 들여다본 작가의 삶 때문이었다.

소설은 인간의 탐욕에 희생되는 고래를 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주인공 소년은 <모비 딕>을 읽고 바다와 고래에 관심이 생겨 고래잡이배에 올라탔다가 고래 사냥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알게 된다. 소년은 이후 동료들과 함께 평생을 고래를 구하기 위해 활동한다. 자전적 소설이니 그 소년은 그린피스에서 활동했던 세풀베다 자신일 것이다.

부조리 이길 힘은 인간의 존엄에서 나와
     
세풀베다가 처음 쓴 소설은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이다. 그를 전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이 작품은, 노동자들의 권리와 자연 보호를 외쳤던 사회운동가 치코 멘데스를 기리기 위한 소설로 알려져 있다.

멘데스는 브라질의 아마존 밀림에서 고무를 채취하던 노동자였는데, 인간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숲을 파괴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것임을 깨닫고 자유와 생명의 가치를 외쳤다. 그의 정의로운 목소리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지만, 그것을 두려워한 세력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다.

그의 죽음에 세풀베다는 아마도 깊은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부정의를 고발하고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사람의 목소리가 그토록 처참히 짓밟히는 것을 보고 새로운 희망을 꿈꾸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세풀베다는 절망하기보다 멘데스의 정신과 영혼을 이어갈 방법을 고민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소설 쓰기였고,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이다.

그런데 소설은 마냥 희망적이지 않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복잡하고, 결말도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다. 주인공 안토니오는 밀림에 개간 사업을 하러 갔다가 사랑하는 아내와 동료들을 잃는다. 낙담했지만 자신에게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원주민들을 만나고, 이제까지 해왔던 일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원주민 친구마저 잃게 되고, 그는 완전히 혼자가 되어 노인이 될 때까지 숲속에서 산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연애 소설을 읽는 것뿐이다. 그런데 읽는 방식이 독특하다. 한 음절, 한 단어, 한 문장을 차근차근 완전히 자기 것이 될 때까지 반복해서 읽는다. 그래서일까. 안토니오는 자연에 완전히 귀의하지도 않지만 인간 문명에 등 돌리지도 않는다.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이 세계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잊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행동과 선택은 늘 신중하고, 그러한 선택에 대해서도 반성하고 성찰한다.

세풀베다는 왜 멘데스를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의 이야기로 기억하려고 했을까. 이미 세상을 떠난 그에게 물을 방법은 없지만, 모순으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도 '연애 소설', 즉 사랑의 이야기를 천천히 읽어내려고 노력하는 한 인간의 숭고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세풀베다 자신이 선택한 삶의 양식이었다.

그는 이 세계에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신중하게 고민했고, 그것을 글과 행동으로 옮겼다. 그래서 그가 쓴 소설은 모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본성을 선택해 내는 존재들이다.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신중하게 생각하고 대화하며 타인을 존중하고 세상에 참여하는 이들이다.

루이스 세풀베다가 첫 소설 이후 펴낸 책 대부분이 아주 쉬운 언어와 다정한 문체로 쓰여 어린이도 읽을 수 있다는 것 역시 깊은 고민 끝에 그가 선택한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절망과 회의와 좌절을 경험하게 하는 세상의 부조리를 이길 힘은 인간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는 삶에서 나오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자기 내면의 가장 아름다운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된다. 세풀베다의 글쓰기는 사려 깊고 진정성 있는 마음의 결과였고, 고귀한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절박한 투쟁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삶의 양식이라고 생각한다. 영유아 시기부터 의대 진학을 위한 교육이 시작되고, 모두가 수도권으로 몰려 지방이 소멸하고, 출생률이 국가의 존속을 위협할 만큼 낮아지는 것은 개인들의 선택으로 빚어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몇몇에게 지원금을 주거나 반대로 불이익을 준다고 해서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다. 특정한 당과 정부가 대책을 마련해 주리라 막연히 기대를 걸 수도 없다.

우리는 이미 세상의 끝에 와 있다
 
 칠레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
ⓒ 위키미디어 공용
   
이 거대하고 복잡한 문제 앞에서 좌절하거나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의 토대다. 이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제대로 들여다보고, 사려 깊이 생각하고, 존엄하고자 투쟁하는 그 자세라면 어떤 방법이 되었든 우리는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할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인간 운명의 공존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부적절하게 대응하는가"라는 수전 손택의 말과, "불행한 사람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는지 물어보는 힘에 인간다움이 있다"고 말한 시몬느 베이유의 말이 떠올랐다.

여기 다 옮겨 쓰지 못하지만, 인간이 이제까지 쌓아온 수많은 위대한 정신의 기록들은 지금 마주한 문제들을 다 해결하기에 이미 충분하다. 인간의 존엄함을 잃지 않고자 온몸으로 글을 썼던 사람들의 말이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봐야 한다.

이런 글을 읽어낼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분명히 나아질 수 있다. 아이들이 숭고한 영혼과 정신을 읽어낸다면 이 지지부진한 문제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해결할 수 있다. 너무 이상적인 말로 들릴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교육 정책이 보여준 비정상적이고 비인간적인 모습에 비하면 너무나 현실적인 방법이 아니겠는가?

<세상 끝의 세상>은 할아버지가 된 주인공이 <모비 딕>을 읽는 한 소년을 발견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본질적인 것은 반드시 이어지고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으면 바다의 고래가 이미 멸종한 후일 수도 있다.

지금 당장 눈앞의 이익에 눈멀어서, 가장 쉬운 방식이어서, 불가능해 보여서, 이런저런 이유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만나지 말아야 할 미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세상의 끝에 와 있다.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으로는 새로운 세상이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다.
 
 이윤영 / <인디고잉> 편집장
ⓒ 이윤영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이윤영은 부산에 위치한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 인디고 서원에서 발행하는 인문교양지 <인디고잉>의 편집장입니다. 청소년기부터 인디고 서원에서 활동하며 인문·문화·교육 활동을 하고 있으며,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들이 세계와 소통하는 세계를 꿈꾸는 시민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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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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