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왕좌의 게임…한국은 없다
‘리니지 라이크’ ‘모바일 편중’ 한계
6억6600만달러.
지난 6월 6일 블리자드가 선보인 신작 액션 RPG ‘디아블로4’가 5일 만에 달성했다고 발표한 매출이다. 한화로 따지면 약 8600억원. 디아블로는 단 5일 만에 엔씨소프트 올해 1분기 매출 2배에 맞먹는 액수를 벌어들였다. 단순 게임 흥행을 넘어 하나의 현상으로까지 평가받는다.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 BTS 슈가 등 셀럽들이 저마다 디아블로 플레이 인증샷을 올리는가 하면, 오피스 지구 인근 PC방은 점심시간 짬을 내 디아블로를 즐기려는 직장인으로 북적인다.
디아블로뿐 아니다. 해외 유명 대작 게임이 최근 잇달아 쏟아지며 글로벌 시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올해 5월에는 수십 년 역사를 자랑하는 닌텐도 시리즈 신작 ‘젤다의 전설: 왕국의 눈물’이, 6월 초에는 일본이 자랑하는 글로벌 대표 격투 게임 시리즈 ‘스트리트 파이터 6’가 공개돼 글로벌 화제몰이에 성공했다. 팬데믹 수혜 종료와 경기 불황이라는 악재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모습이다.
당장 실적이 부진하다. 엔씨소프트 올해 1분기 매출은 4788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9%, 같은 기간 영업이익(816억원)은 67%나 감소했다. 넷마블은 6분기 연속 적자를 이어가고 있다. 올해 1분기 영업손실 282억원을 기록했다. 전년(119억원)과 비교하면 적자폭이 2배 넘게 늘었다.
다른 국내 주요 게임사도 상황은 비슷하다. 1분기 크래프톤 영업이익(2830억원)은 전년 동기 대비 10%, 카카오게임즈(113억원)와 펄어비스(11억원) 역시 각각 73%, 79% 감소했다.
투자 심리도 얼어붙은 지 오래다. 2021년 2월 104만8000원으로 신고가를 기록했던 엔씨소프트 주가는 6월 22일 기준 30만원으로 추락했다. 12만원 선을 유지하던 넷마블 주가는 하락을 거듭, 6월에는 5만2000원대까지 주저앉았다. 크래프톤도 별반 다르지 않다. 2021년 11월 기업공개(IPO) 대박과 함께 최고가 58만원을 찍었지만 올해 6월에는 20만3000원에 머무르고 있다. 같은 기간 펄어비스는 14만5200원에서 5만원으로, 카카오게임즈는 11만6000원에서 3만5000원으로 폭락했다.
‘미래 신성장동력’으로 평가받던 게임 산업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이유는 뭘까. 매경이코노미는 K-게임 위기 요인을 ‘레몬(LEMON)’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해봤다. 리니지 라이크(Lineage like), 개발자 리스크(Engineer risk), 모바일 편중(Mobile overvaluation), 차기작 부진(One game wonder), 글로벌화 실패(Non-global)의 앞글자에서 따왔다.
L : Lineage like
과금 유도하는 ‘양산형 RPG’
‘리니지 라이크’는 국내 게임업계에서 공공연히 쓰이는 말이다. 게임사들이 ‘리니지 성공 모델을 그대로 베낀 게임’을 내놓으면서 대두된 단어다. 좋은 뜻은 아니다. 당장 수익이 확실한 모델만 좇다 보니 혁신에 뒤처졌고 지금 같은 암흑기가 펼쳐졌다는 의견이다.
시작은 2017년이다. 엔씨소프트가 선보인 모바일 MMORPG(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 ‘리니지M’이 서비스 시작 직후 월 3000억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하는 신드롬급 흥행을 일으켰다. 핵심은 ‘과금 유도’다.
유저 간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돈을 써야 하는 이른바 ‘페이 투 윈’ 방식이 먹혀들면서 폭발적인 매출 성장으로 이어졌다.
이후 게임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리니지M을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다. 넥슨 ‘V4’를 비롯해 위메이드가 선보인 ‘미르4’와 ‘미르M’, 웹젠의 ‘R2M’ 등이 대표적인 리니지 라이크 게임으로 꼽힌다. 엔씨소프트는 말할 것도 없다. ‘리니지2M’과 ‘리니지W’ 등 리니즈 시리즈를 이어나가는 것은 물론 ‘트릭스터M’ ‘블레이드&소울2’ 같은 신작 역시 유저들로부터 ‘자가복제’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였다.
문제는 리니지 라이크 성공 방정식의 ‘약발’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 비슷한 패턴과 과금을 유도하는 정책이 반복되면서 유저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양산형 MMORPG 개발에만 치중하다 보니 포트폴리오가 단순해졌고 게임사마다 다양성도 사라졌다. 소수 헤비 과금 유저에게 의존하던 방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기 시작하면서 미래 가치뿐 아니라 당장 실적에도 타격을 입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E : Engineer risk
개발자 함정에 빠진 게임업계
‘개발자 리스크’도 무시 못한다. 팬데믹 기간 동안 IT업계 전반에서 개발자 수요가 급증했다. 게임사 역시 경쟁적으로 개발자 모시기에 나섰다. 영입 경쟁은 몸값 폭등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오른 인건비가 팬데믹 종료 후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는 평가다.
개발자 인건비 리스크는 수치로도 나타난다. 엔씨소프트·크래프톤·넷마블·카카오게임즈·펄어비스·컴투스·위메이드 등 국내 증시에 상장된 주요 7개 게임사 올해 1분기 인건비는 총 6933억원으로 집계됐다. 팬데믹 초기인 2020년 1분기(4674억원)에 비해 48.3% 급증했다. 같은 기간 7사 영업이익은 58% 넘게 감소했다. 영업이익률도 줄었다. 2020년 평균 27%에서 2022년에는 15%대까지 하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싼 돈을 주고 개발자를 모셔왔지만 정작 신작 개발에는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도 아이러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신작 개발이 ‘올스톱’ 된 것. 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신작을 준비할 때는 개발자는 물론 기획과 디자인 등 여러 파트 간 유기적인 협력이 중요하다”며 “팬데믹 재택근무 장기화로 신작 일정에 차질을 빚은 것이 실적 부진 원인 중 하나”라고 말했다.
모바일 게임에 편중된 매출
‘모바일 게임’에 치우쳐 있는 사업 모델도 한계로 지적된다. 예를 들어 엔씨소프트 올 1분기 매출에서 모바일 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70%에 달한다. 카카오게임즈 역시 매출 62%가 모바일 게임에서 나왔다.
문제는 모바일 게임 시장이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22년 글로벌 모바일 게임 시장 규모는 전년 대비 6.4% 감소한 922억달러를 기록했다. 여전히 전체 게임 시장 50%를 차지할 만큼 크지만 방향 자체는 꺾였다. 유저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모바일이 구현할 수 없는 고품질 그래픽, 방대한 서사 등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탓이다. 알기 쉽게 디아블로4, 젤다의 전설 등 최근 글로벌 인기몰이 중인 게임 중에서는 모바일 게임을 찾아보기 어렵다. 2021년 기준 글로벌 게임 시장에서 국내 콘솔 게임이 차지하는 비중(매출액 기준)은 1.7%에 그친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소니, 마이크로소프트, 닌텐도 등 글로벌 게임 기업은 신작이 나오면 콘솔 같은 하드웨어 매출 증가도 기대할 수 있다. 여기에 애플 ‘비전 프로’ 등 헤드셋 대중화로 VR 게임 시장이 커질 경우, 모바일 게임에 주력하던 회사들은 비디오 게임사 대비 적응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O : One game wonder
히트작 하나에만 의존하는 기업들
원 히트 원더(One hit wonder).
히트곡 하나만 남기고 사라진 가수를 일컫는 말이다. 게임업계에는 ‘원 게임 원더’가 있다. 게임 하나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큰 기업을 가리키는 용어다. 국내 게임사 대부분이 ‘원 게임 원더’다. IP 강자인 넥슨이나 라인업이 다양한 넷마블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특정 게임에 매출 비중이 쏠려 있다.
특정 IP를 지나치게 많이 활용하다 보니 신선함이 떨어지고, 기존 IP 자체의 경쟁력도 갉아먹는다. 엔씨소프트의 경우 ‘리니지M’ ‘리니지2M’ ‘리니지W’ 등 ‘리니지 IP’가 전체 매출의 73%를 책임진다. 리니지가 잘나갈 때는 문제 없지만, 반대로 리니지 하나가 부진하면 전체 실적이 흔들린다.
다른 게임사도 별반 다르지 않다. 크래프톤은 배틀그라운드 IP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원 게임 리스크에서 벗어나기 위해 ‘칼리스토 프로토콜’ 등 대작을 내놨지만 비중은 미미한 수준이다. 컴투스 역시 ‘서머너즈 워’ IP가 수익에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지적을 듣는다.
N : Non-global
해외 시장, 미미한 존재감
게임 시장·산업 규모에 비해 한국 게임은 해외 인지도가 매우 낮다. 국내 게임이 해외에서 성공한 사례를 보면 대부분이 모바일 게임이다. 던전앤파이터, 크로스파이어 등 해외 시장에서 성공을 거뒀다는 스토리는 모두 중국 시장에서 들려왔다. 게임 선진국이라 불리는 미국과 일본에서는 성공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에는 중국 시장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한다. 한한령, 코로나19 봉쇄 정책에 더해 중국 게임사의 비약적인 발전까지 이뤄지면서 중국 시장에서 입지를 잃어버렸다.
모바일 게임에 치중된 구조가 결국 발목을 잡았다. 한국 게임이 외국에서 부진한 가장 큰 이유로는 ‘플랫폼 다변화 부족’이 꼽힌다. 국내 게임사들은 해외 게임사에 비해 콘솔용 게임에 대한 개발이 미온적이었다.
문제는 세계 게임 시장에서 콘솔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점이다. 세계 1위 게임 시장인 북미의 경우 콘솔 비중이 34%에 달한다. 미국과 유럽같이 인터넷 환경이 발달하지 못한 나라는 여럿이 접속하는 온라인·모바일 게임보다는 집에서 홀로 즐길 수 있는 콘솔 게임이 더 각광받는다. 해외 이용자에게 맞지 않는 게임만 만들다 보니, 제대로 된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K-게임, 전망은
여름 신작 줄줄이…중국 개방 ‘호재’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당장 2023년 하반기, K-게임에 대한 기대감은 높은 편이다. 호재가 꽤 있다. 팬데믹 기간 중단됐던 신작 출시가 잇따를 예정이고 중국 판호 개방에 따른 수혜도 기대된다.
넷마블은 7월부터 수집형 RPG ‘신의 탑: 새로운 세계’,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MMORTS) ‘그랜드크로스: 에이지 오브 타이탄’, 방치형 RPG ‘세븐나이츠 키우기’를 글로벌 시장에 순차적으로 내놓는다. 카카오게임즈 역시 올 3분기 MMORPG ‘아레스: 라이즈 오브 가디언즈’를 선보인다. 사전 등록 참여 인원이 2주 만에 150만명을 돌파하며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동안 불모지나 다름없던 ‘콘솔 게임’ 라인업도 늘어난다. 지난해 독일 게임 시상식인 ‘게임스컴’에서 3관왕을 달성한 네오위즈 ‘P의 거짓’이 대표적이다. 고전 동화 ‘피노키오’를 잔혹극으로 각색해 만든 싱글 플레이 액션 신작으로, 올해 9월을 목표로 막판 담금질 중이다. 엔씨소프트 신작 ‘쓰론 앤 리버티(TL)’, 시프트업이 개발 중인 소니 플레이스테이션5(PS5) 독점작 ‘스텔라 블레이드’도 기대작이다.
중국 시장 판호 발급이 본격 재개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 역시 긍정적이다. 지난해 12월 중국 외자 판호를 받은 스마일게이트 ‘에픽세븐’과 ‘로스트아크’가 중국 정식 서비스를 눈앞에 뒀고 넷마블 ‘일곱 개의 대죄’, 넥슨 ‘블루 아카이브’, 데브시스터즈 ‘쿠키런: 킹덤’ 역시 중국 출시를 준비 중이다. 펄어비스 PC 게임 ‘검은사막’도 텐센트와 퍼블리싱 계약에 성공했다.
안재민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그동안 게임사들이 본업보다 블록체인·메타버스 등 신사업에 눈을 돌리고 팬데믹 쇼크까지 겹치면서 신작들이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신작 개발에 다시 속도가 붙은 덕에 올해 하반기부터는 예년 수준을 넘어서는 신작 라인업이 공개될 예정”이라며 “최근 부진한 게임 업황 개선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15호 (2023.06.28~2023.07.0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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