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과 아문센, 남극을 향한 어긋난 욕망
[이준목 기자]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할수 있다는 오만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극한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목표를 중시하는 리더'와 '사람을 중시하는 리더'의 차이는 무엇인가. 20세기 초 전세계적인 관심사였던 남극점 정복을 둘러싸고 두 탐험대가 벌였던 '세기의 경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수많은 철학적 화두를 남기고 있다.
6월 27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05회에서는 '세상 끝을 향한 죽음의 레이스, 남극 전쟁'편을 통하여 출연진은 남극 대륙을 정복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의 역사와 그 뒷이야기를 파헤쳤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국 근현대사-대서양사를 연구한 김대륜 대구경북과학기술원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남극은 지구상에서 가장 추운 곳이자, 5대양 6대주에 이은 지구의 '7번째 대륙'으로 꼽힌다. 남극의 면적은 약 1천4백만㎢로, 호주-미국보다 거대하고 남아메리카 전체 면적에 필적한다. 겉보기에는 얼음뿐인 척박한 땅으로 보이지만 그 아래는 석탄과 석유, 천연가스, 광물 등 인류 전체가 100년 이상 사용하고도 남을 양이 매장되어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생물과 풍부한 자원의 보고인 남극은 세계 각국이 차지하고 싶어하는 '기회의 땅'이자 '인류의 마지막 보물창고'로 불리기도 한다. 현재 남극은 누구의 땅도 아니지만, 가까운 근미래에는 남극을 두고 치열한 영토분쟁이 불가피하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남극이 인류 역사의 중심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부터다. 15세기 '대항해 시대' 이후 서구인들을 중심으로 신대륙 탐험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지구의 남쪽 끝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었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해군함선이 '남극의 입구'로 불리우는 사우스조지아 섬을 발견하면서 최초로 남극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강대국들은 식민지 개척을 위하여 탐사활동에 가장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로라하는 탐험가들이 여러 차례 도전했지만, 번번이 거대한 얼음 장벽과 극한의 추위에 가로막혀 남극 탐험에는 끝내 실패했다.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경쟁이 절정에 달하면서 더 이상 차지할 땅이 없었던 유럽 제국들은 이제 극지방에 본격적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특히 가장 적극적으로 남극탐험을 추진했던 것은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대영제국이었다.
영국은 학자와 탐험대를 보내면서 다른 국가들보다 한발 앞서 남극 탐험에 나섰다. 여기에 앞장선 인물이 바로 해군장교이자 탐험가인 로버트 스콧(1868-192)이었다. 그는 1901년부터 1904년까지 1차 탐험대를 이끌고 첫 관문에 해당하는 로스 빙붕을 통과하는데 성공하면서 최초로 남극 대륙 본토에 발을 들인 인물이 됐다.
남극에 첫 베이스캠프를 차리는데 성공한 스콧의 다음 목표는 인류 최초의 남극점 도달이었다. 당시 식민제국주의 시대에서 '남극점 선점이란 곧 남극을 정복한다는 의미'와 같았다.
하지만 스콧의 첫 탐험은 얼마가지 못해 큰 난관에 봉착했다. 당시 베이스캠프에서 남극점까지의 거리만해도 왕복까지 2800km로 서울-부산의 9배 거리였다. 남극점까지 가는 길은 끝이 없는 얼음 빙판과 산맥을 횡단해야하는 목숨을 건 여정이었다. 악전고투속에서도 400km나 전진했던 탐험대는, 결국 식랑과 연료부족에다가 대원들 사이에서 괴혈병까지 돌기 시작하자 결국 고심 끝에 베이스캠프 철수를 결정했다. 그렇게 첫 탐험이 실패로 끝난 이후 스콧은 "모든 게 엉망이고 체계가 없었다"고 자책했다고 한다.
하지만 스콧 탐험대가 영국으로 다시 귀국했을 때, 오히려 열렬한 환영인파가 쏟아질만큼 여론의 반응은 뜨거웠다. 국왕 에드워드 7세는 스콧에게 훈장까지 수여했다. 당시 영국은 2차 보어전쟁 초기에 패전을 거듭하며 제국의 자존심이 흔들리던 시기에, 스콧을 영국의 위상을 높인 영웅이자 위대한 탐험가로 부각시켜 정치적으로 선전했다.
1909년 스콧은 5년만에 두 번째 남극 탐험을 선언하며 발표문에서 "목표는 남극점에 유니온 잭(영국의 국기)을 꽃는 것이다. 이는 영국의 위대함을 보여줄 것"이라고 자신했다. 같은해 미국 탐험대가 먼저 북극점 정복에 성공하며 이제 인류에게 남은 최후의 극지방인 남극점 정복을 둘러싼 세계의 눈치싸움은 더욱 치열해졌다.
영국 사회는 스콧의 재도전 소식에 열광했다. <셜록 홈즈>의 작가로 유명한 아서 코난 도일도 "이제 남극점밖에 남지 않았다. 남극점은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한다"며 스콧을 지지하는 기고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스콧의 2차 탐험대는 1910년 6월 1일 '테라 노바(새로운 땅)'라는 이름을 붙인 탐험선을 타고 남극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남극으로 향하던 스콧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바로 같은 시기에 남극으로 출발한 강력한 '라이벌' 로알 아문센(1872-1928)의 등장이었다. 노르웨이가 배출한 세계적인 탐험가 아문센은 훗날 지구의 두 극점을 모두 정복한 최초의 인물이며 영국이 수백년간 실패했던 북극 항로(북서항로)를 개척해낸 인물이기도 하다.
아문센은 남극보다 앞서 북극점 정복을 추진했으나 1909년 로버트 피어리가 이끄는 미국 탐험대에게 먼저 선수를 빼앗긴 것으로 알려졌다. 아문센은 이를 두고두고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에 피어리의 탐험대는 실제로는 북극점에서 약 40km에 못 미치는 지점까지 도달한 것으로 밝혀졌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사실상 북극점에 최초로 도달한 인물은 피어리가 아닌 아문센이라는 게 정설이 되었지만, 정작 아문센 본인은 생전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문센은 북극점의 한을 풀기 위하여 이번에는 남극점 정복으로 눈을 돌렸다. 아문센은 강대국이었던 영국의 견제를 의식하여 남극점 탐험 사실을 철저히 숨겼고, 보안을 위하여 영국만이 아니라 노르웨이 왕실과 후원자들, 심지어 자신의 대원들에게까지 목적지를 북극이라고 속였다.
1910년 6월 7일, 아문센 탐험대는 스콧 탐험대가 출발한 지 6일 만에 함선 프람호를 타고 노르웨이를 출발하여 남극으로 향했다. 아문센은 아프리카 인근에 도착해서야 스콧에게 남극행을 알리는 전보를 보내며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했고, 당시 보급품을 싣기 위하여 호주에 있었던 스콧은 경악했다.
1911년 1월 4일, 1차 탐험당시 도달했던 로스 빙붕의 끝자락에 도착하여 첫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그로부터 10일후에 아문센 탐험대로 반대편 끝자락에 도달했다. 당시 두 탐험대의 거리는 약 640km에 불과했다.
두 탐험대는 그해 2월 스콧의 테라노바호가 빙붕 일대를 탐색하다가 우연히 아문센의 프람호를 발견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은근한 신경전을 벌였다. 베이스캠프 건설과 식량 운반을 마치며 준비기간을 거친 두 탐험대는, 남극의 기온이 다소 올라가는 10월 여름이 찾아오면서 드디어 남극점을 향한 '죽음의 레이스'를 시작한다.
남극점을 향한 두 팀의 이동 전략은 처음부터 전혀 달랐다. 스콧은 1차 탐험의 실패를 거울삼아 극지 탐험가들의 조언을 토대로 특수제작한 모터 썰매 2대를 준비했으며 추위에 강한 시베리아산 조랑말과 썰매개도 데려오는 등 만반의 대비를 했다. 반면 아문센은 4대의 썰매에다가 운송수단으로는 썰매개만 오직 52마리를 준비하여 대조를 이뤘다.
먼저 출발한 쪽은 아문센이었다. 1911년 11월 19일, 아문센과 4명의 대원들은 남극점으로 역사적인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노르웨이 탐험대의 썰매개들은 추위를 뚫고 엄청난 속도로 질주했다. 아문센의 대원들은 이미 북극항로를 개척하던 과정에서 현지 원주민인 이누이트에게 개썰매를 다루는 노하우를 완벽하게 마스터한 상태였다.
아문센은 훗날 기록에서 "이 개들이 잘해낼 거라라고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훌륭할지는 몰랐다. 스키를 타고 극점까지 내달리다니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며 만족스러워 했다. 아문센의 탐험대는 썰매개들의 활약으로 불과 한 달 만에 로스빙붕을 횡단하여 남극으로 진입했다.
반면 스콧은 출발부터 연이은 난관에 봉착했다. 출발한지 얼마되지 않아 모터썰매의 엔진이 남극의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고장이 나고 말았다. 간신히 짐을 재분배하며 다시 출발하려는 스콧 탐험대에게 이번엔 강렬한 블리자드(눈폭풍)에 이은 화이트아웃(눈 때문에 시야확보가 어려워져서 방향과 거리감각 상실)까지 닥쳤다.
여기에 모터썰매 대신 짐을 운송해야 할 말들의 상태도 급격히 나빠졌다. 땀샘이 없어 추위에 강하고 잡식성이라 적응력이 뛰어난 개와는 다르게, 추위에 약하고 먹이도 제한된 말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치명적인 실수였다.
스콧은 남극으로 출발하기전 노르웨이 탐험가이자 과학자인 프리드쇼프 난센이 "극지방에서는 개가 유리하다"는 조언을 듣고도 이를 무시했다. 결국 약해진 말이 눈속에 파묻히자 오히려 사람들이 말을 억지로 끌어내면서 가야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졌다. 간신히 로스 빙붕을 건넌 스콧 탐험대는 결국 한계에 도달한 말들을 모두 죽일 수밖에 없었다.
조급해진 스콧은 아문센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하여 남극점으로 가는 지름길을 선택한다. 그가 찾아낸 길은 비어드모어 빙하로 백두산보다 높은 해발 3천미터의 고도에 위치했으며 급격한 경사의 미끄러운 빙하를 올라가야 하는 위험한 루트였다. 심지어 운송수단을 모두 상실한 스콧 탐험대는 사람의 힘으로 썰매를 끌고가는 무모한 방식을 감수해야 했다.
그 무렵 아문센 탐험대도 천신만고 끝에 얼음 산맥과 사스투르기(극지방의 바람 때문에 표면이 파도처럼 깎인 지형)를 횡단하여 남극 고원에 도달하고 있었다. 아문센은 스콧과 달리, 무리하게 속도를 올리기보다는 며칠에 걸쳐 산맥의 지형을 살핀 뒤 최대한 신중하고 안전하게 전진하며 새로운 루트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남극 고원에 도착한 아문센은 그동안 고생한 썰매개 24마리를 죽이고 식량으로 활용하는 비정한 결단을 내렸다. 현대같으면 동물학대로 범죄가 될 수 있는 사안이지만, 아문센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목표를 달성했어야만 했다"며 단호하게 자신의 결정을 옹호했다.
1911년 12월 14일, 아문센의 노르웨이 탐험대가 마침내 남극점에 먼저 도달했다.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서 깃발을 꽃는 순간이었다. 이들은 남극점에서 3일 동안 머물렀고 혹시라도 계산이 틀렸을 가능성을 대비하여 여러 방향으로 이동해가면서 철저하게 남극점의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한편 악전고투 끝에 스콧 탐험대도 얼음 산맥을 통과하고 남극점에 도착했으나 이미 아문센 탐험대보다는 34일이나 뒤처졌다. 1912년 1월 17일, 스콧 탐험대는 남극점에서 펄럭이는 노르웨이 국기와 텐트를 확인하고 절망과 허탈감에 빠졌다.
스콧은 오는 길에 사람의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기에 아문센이 새로운 루트를 찾았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남극점 도착 직전까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문센은 이미 베이스캠프 선정 때부터 철저한 계산을 바탕으로 남극점에 도달할 수 있는 최단거리 루트를 확보해 놓은 상태였고 실제 스콧이 걸었던 경로보다 110km 가까이를 단축하는 데 성공했다.
남극점에는 아문센이 스콧과 노르웨이 국왕에게 전하는 편지가 놓여 있었다. 아문센은 이 편지에서 스콧 탐험대를 '우리 다음으로 이 곳에 도착할 최초의 인간'으로 정의하는가 하면, '자신이 남극점에 먼저 도달했다는 증거가 될 편지를 노르웨이 국왕에게 대신 전해달라'는 부탁까지 남기며 은근하게 조롱했다. 스콧으로서는 어마어마한 굴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참담해진 스콧은 일기에서 "위대하신 하나님, 그토록 고생하고 선두를 빼앗기다니 이곳은 너무나 끔찍하고 처참한 곳이 아닌가"라며 한탄했다.
하지만 스콧 탐험대의 진짜 비극은 지금부터였다. 스콧과 대원들은 이미 극심한 피로와 부상에 그동안의 고생이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정신적 박탈감까지 겹치며 만신창이였다. 스콧 탐험대가 남극점에 도착한 것은 1월 중순, 3월부터는 남극의 혹독한 겨울이 시작되는데 베이스캠프까지 1400km에 이르는 거리를 약 45일 안에 다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미 체력이 바닥난 스콧 탐험대에게는 왔던 길보다 더 험난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탐험대는 본래 만약을 대비하여 오는 길목마다 비상식량과 연료를 저장해 두었지만, 눈과 바람 때문에 길 자체가 변해버리면서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스콧 탐험대는 결국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첫 희생자인 에반스 대원이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동사했다. 극한의 상황에 몰린 스콧은 급기야 대원들에게 비상수단으로 마약인 아편을 전하며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게 했다. 결국 고통을 이기지 못한 오츠 대원이 아편을 가지고 어디론가 사라지며 두 번째로 운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남은 세 사람도 마지막 힘을 짜내 전진을 거듭했지만, 탈진하여 방향을 잃고 헤매다가 결국 전원이 사망하면서 스콧 탐험대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아문센의 탐험대는 스콧과 달리 일찍 남극점을 출발했고 남은 개들로 썰매를 운용하여 단 한명의 사망자도 없이 전원 안전하게 베이스캠프로 복귀했다. 아문센의 탐험대는 노르웨이로 돌아왔고 남극점 정복 소식은 빠르게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아문센은 노르웨이의 영웅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남극과 북극에서도 무사귀환했던 불사조 아문센도 1928년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했다.
스콧의 시신은 8개월 이후에야 구조대에 의하여 발견됐다. 안타깝게도 그가 발견된 곳은 베이스캠프까지 불과 250km밖에 남겨두지 않은 거리였다. 스콧은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일기를 가슴에 꼭 품고 있었다고 한다. 일기에는 그간의 남극탐험에 대한 세세한 기록들이 남겨져 있었고 스콧은 "우리가 살아간다면 모든 영국인들의 가슴을 뒤흔들 탐험대의 용기와 인내를 말해줄 수 있었을텐데, 이 짧은 글과 시체가 우리의 이야기를 대변해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스콧의 무덤은 동료들과 함께 그가 잠든 남극에 만들어졌다. 영국은 스콧 탐험대의 전멸로 큰 충격에 빠졌고 그들의 장례식과 추모행사에는 수만 명의 인파가 운집하여 탐험대의 용기와 헌신을 애도했다고 한다.
남극점 정복 전쟁은 지금 현대의 시선으로 봐서는 부질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오히려 진정한 가치는 누가 남극에 먼저 도달했느냐가 아니라, 두 탐험대의 선구적인 노력으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남극 탐사의 귀중한 경험과 자료를 마련했다는 데 있다.
스콧의 비극은 오로지 남극점 선점이라는 경쟁에만 집착하다가 자신과 동료들의 목숨까지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는 스콧이 경쟁자인 아문센은 물론이고, 그보다 먼저 남극점에 도전한 영국인으로 비록 똑같이 실패는 했지만 자신과 대원들 전원을 무사히 귀환시켰던 또다른 탐험가 어니스트 새클턴(1874-1922)보다 낮은 평가를 받는 원인이다.
당시에는 서구사회를 지배하던 제국주의와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한때 스콧을 '비운의 영웅' '순교자'로 추앙하던 영국사회에서도 이성적 합리주의와 인권의식이 높아진 현대에 접어들면서 적극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1959년 12월 1일, 국제사회는 '남극조약'을 통하여 남극을 특정한 국가가 소유할 수 없는 인류 공통의 영역으로 남기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남극조약이 만료되는 2048년이 되면, 남극을 차지하기 위한 강대국들의 '21세기판 남극점 정복 경쟁'이 재현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인류의 역사는 돌고돌며 때로는 같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반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스콧과 아문센 탐험대의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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