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개 용병이 본토 휘저었다…"종이호랑이" 실체 드러난 군사대국

이근평 2023. 6. 28.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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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 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반란을 통해 러시아군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무모해 보였던 프리고진의 반란에 수도 모스크바까지 위협받으면서 ‘종이호랑이’ 러시아 아니냐는 비아냥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바그너 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연합뉴스


세계 2위 군사대국 본토가 뚫렸다


지난 23일(현지시간) 프리고진이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부 장관을 공개 비난하며 쿠데타를 암시했을 때만 해도 바그너 그룹이 모스크바까지 위협할 것이라는 관측은 많지 않았다. 용병 그룹이 아무리 강해도 세계 2위 군사강국의 정규군을 상대하는 건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바그너 그룹은 러시아 남부 로스토프주의 국경 검문소를 지나 로스토프나도누의 군 사령부를 순식간에 접수했다. 이후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약 500㎞ 떨어진 보로네시주의 주도 보로네시, 모스크바 남쪽으로 약 350㎞ 떨어진 리페츠크주까지 진격했다. 단 하루 만에 약 1000㎞를 쾌속 진군했다. 진격 병력은 5000~1만 명으로 추정된다.

김현서 디자이너

이들의 파죽지세는 모스크바를 약 200㎞ 앞둔 상황에서 프리고진의 철수 지시로 마무리됐으나 러시아군의 허술한 대비태세는 이미 드러난 후였다. 군사전문가들은 전방에 전투 병력을 보내 전쟁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군의 ‘틈’이 노출된 때문으로 분석한다. 류성엽 21세기군사연구소 전문연구위원은 “러시아 정규군 정예 병력 상당수가 우크라이나의 중부와 서부 전선에 투입돼 후방에는 예비병력 등 유명무실한 전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러시아와 바그너 그룹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러시아는 더 많은 정규군을 최전선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바그너 그룹이 러시아군의 본거지인 로스토프나도누를 쉽게 장악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된다. 최현호 군사 칼럼니스트는 “가뜩이나 광활한 영토에 20~30만 명이 우크라이나 전선에 투입되다보니 본토 부대는 경호형 부대 수준이 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러시아군은 85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러시아 정부는 추가 병력이 필요하다고 보고 지난해 동원령을 내리기도 했다.


일개 용병 집단이 주력으로…러시아의 ‘업보’


이 같은 사태는 러시아가 전쟁에 용병을 끌어들이면서 이미 예견됐다. 신종우 한국국방안보포럼 사무국장은 “쉽게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용병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던 게 러시아로선 첫 단추를 잘못 꿴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프리고진이 2014년 창립한 ‘민간군사기업(PMC) 바그너’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당시 러시아를 도왔고, 이후 시리아·리비아·말리 등에서 용병으로 싸우며 부를 축적했다. 러시아는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 때도 바그너 그룹을 필요로 했다. 개전 초기, 키이우를 치고 전쟁을 조기에 마무리하겠다는 구상이 어그러지면서다.

바그너 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 AP=연합뉴스

바그너 그룹은 죄수 부대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도네츠크, 바흐무트 등 최대 격전지를 러시아가 점령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중 바흐무트에선 8개월 이상 우크라이나군과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결국 우크라이나군이 퇴각했다. 이럴 정도로 최전방에서 바그너 그룹의 전력이 러시아군에 큰 도움이 됐다.

올해 초 영국 국방부는 바그너 그룹 병력이 5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추산했다. 최현호 칼럼니스트는 “이중 죄수가 8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지만 핵심 전력은 실제 전장 경험이 풍부한 전투 ‘베테랑’이라고 봐도 된다”고 말했다. 바그너 그룹이 모스크바로 향하면서 러시아 군용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한 데서 알 수 있듯 상당한 수준의 무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다. 러시아 입장에선 ‘호랑이 새끼를 키운 격’이었다.

러시아의 실패는 상비군 병력 감소를 앞두고 모병제 필요성이 대두하고 있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류성엽 위원은 “모병제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려면 결국 경제력을 통해 평시에도 전시를 대비한 적정 병력이 확보돼있어야 한다”며 “러시아는 모병제의 실패를 용병으로 극복하려다 더 큰 문제들을 떠안게 됐다”라고 지적했다.


전쟁 시작부터 망신살 러시아


지난해 2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내 ‘특별군사작전’을 승인할 당시 전쟁이 장기전으로 흐를 것이라는 관측은 많지 않았다. 양국 전력상 러시아의 승리는 시간문제로 보였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양상은 전혀 달랐다. 침공 초 체르노빌 원전을 손에 넣은 뒤 키이우로 돌진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결사항전에 저지당하며 수도 함락 전격전에 실패했다. 우크라이나의 저항이 미미할 것으로 오판한 결과였다.

2위 군사대국이라기엔 평소 병력 관리와 훈련이 제대로 이뤄졌는지에 대한 의문을 야기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수도 진격전에선 60㎞에 달하는 차량 행렬이 늘어서며 공중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장면이 등장했다. 개전 초기 러시아군 헬기 부대가 마치 소풍을 가듯 한가롭게 주간에 열을 지어 직선으로 날아가다가 우크라이나군 미사일을 맞고 떨어지는 굴욕도 SNS로 지구촌에 퍼졌다.

그 사이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무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을 벌어 반격에 나섰다. 러시아는 흑해 함대의 기함 모스크바함과 주력 공격헬기 Ka-52 20대 이상을 잃는 등 치욕을 맛봤다. 이같은 개전 초기 정규군의 굴욕이 바그너 그룹의 발언권을 확대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현재진행형이고 전황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하지만 그간 군사강국으로 대접받던 러시아는 키이우 점령 실패부터 용병의 모스크바 위협까지 계속 상처를 입고 있다.

바그너 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지난 24일(현지시간) 모스크바 진격 중단을 발표하고 반란의 거점인 러시아 남부 사령부 소재의 로스토프를 떠나면서 밖의 시민을 지켜보고 있다. AP=연합뉴스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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