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유산유도제 도입, 식약처는 응답하라
[혜원 기자]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후 4년, '낙태죄'의 법적 효력이 사라진 지 3년차가 되었다. 세계보건기구는 모든 국가가 조건 없이 안전한 임신중지를 보장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지만 정부는 아직까지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보건의료 체계 마련, 건강보험 보장, 유산유도제 도입을 미루고만 있다. 임신중지에 사용하는 약인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은 세계보건기구에서 지정한 필수 핵심 의약품이며, 올해 약을 승인한 아르헨티나와 일본을 포함해 현재 전 세계 95개국에서 안전하게 사용하고 있다.
유산유도제 도입과 건강보험 적용은 특히 비용이나 노동 조건, 연령, 장애, 국적 등의 이유로 의료기관에 대한 접근성이 낮거나 폭력 피해에 처한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에서는 6월 15일까지 ‘유산유도제 도입과 필수의약품 지정 촉구 다수인 민원 보내기 캠페인’을 진행했다. 다수인 민원 진정서는 6월 26일 기자회견 후 식약처장 앞으로 발송되었다. 식약처장의 책임있는 답변을 기다리며 “모두를 위한 유산유도제 도입을!” 연재를 마무리한다. [기자말]
"미프진을 구매하고 싶습니다"
단체 메일로 유산유도제(미프진) 구매를 원한다는 문의를 받았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4년,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된 지 2년 6개월이 지났음에도 유산유도제가 승인되지 않아 공식적으로 구입할 수 없다는 회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실 온라인을 통해 '구매'는 할 수 있다.
인터넷에 미프진을 검색하면 각종 구매처 정보와 함께 진짜 '정품'이라는 광고 글이 쏟아진다. 약물을 통해 임신중지가 가능하다는 걸 아는 여성들은 유산유도제를 구입하기 위해 비용을 마련하고, 구매처를 찾아 '정품'인지를 확인한 후 구매한 약이 도착하길 기다린다.
이렇게 구한 약을 기간 내에 안전하게 배송받을 수 있을지, 어디에서 어떻게 전해져 오는지, 어떤 성분인지 알 수 없을뿐더러 복용법이나 혹시 모를 부작용 등에 관한 정보가 잘 전달되지 않기도 하며, 복용했음에도 효과가 없었다는 후기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유산유도제나 임신중지 수술에 관한 정보들은 대체로 온라인상에서 유통되고 있고, 그중에서도 익명 기반 임신중지 정보 어플에서는 병원 정보와 수술 후기가 공유되고 있다. 병원마다 주수를 기준으로 수술 비용이 천차만별이고, 모자보건법 14조에 해당하지 않는 수술은 불법이라며 비밀상담을 유도하기도 한다.
또, 여전히 파트너나 보호자의 동의나 동행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정부와 보건당국이 아직까지 안전한 임신중지를 보장하기 위한 보건의료 체계를 제대로 구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권리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
▲ 온라인에는 여전히 잘못된 정보가 많다. 일부 의료기관에서 말하는 "모자보건법 14조에 해당되는 경우가 아니면 불법"이라는 정보가 잘못된 내용임을 알리는 셰어의 카드뉴스 (전체 카드뉴스는 이 페이지(https://srhr.kr/SRHR01/?idx=13616418&bmode=view) 에서 볼 수 있다. |
ⓒ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보장 네트워크 |
임신중지가 필요한 청소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떠한 경우에도 의료기관은 환자 당사자의 의사결정을 최우선으로 존중해야 하며, 필요한 정보와 안내를 당사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제공해야 한다. 캐나다, 영국, 뉴질랜드를 비롯한 해외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청소년들이 이런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의료인과 보호자 등 제3자에게도 당사자 권리 보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에서는 임신중지를 하고자 하는 청소년들이 법적대리인이나 보호자의 동행을 요구받고 있다. 임신중지 정보 어플에서는 법정대리인의 동의나 동행 없이 수술이 가능한 병원, 법정대리인이 아닌 만 20세 이상 보호자의 동행만으로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찾는 게시글이 대부분이다.
일부 청소년 임신중지 지원금에 대해 공유하는 게시글에서는 지원금을 받으면 부모님에게 알려질까봐, 기록에 남을까봐 지원금을 꺼려한다. 이에 임신중지를 원하는 청소년들은 만 20세 이상 여성의 신분증을 빌리거나 구매하여 수술을 받기도 한다.
이주민, 난민의 경우 의사소통 문제로 인터넷 검색과 어플을 통한 임신중지 정보 접근성이 더욱 떨어진다. 또한,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프더라도 병원에 가지 못한다.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해 비싼 의료비를 납부해야 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이주민과 난민은 강제 추방 단속을 피하기 위해 숨어서 지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은 난민인정률이 1%가 채 되지 않는다. 난민신청 과정에서조차 통·번역을 제대로 지원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의료기관을 이용하기란 더욱 큰 장벽이 된다.
한국에서 살아갈 권리조차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임신사실을 확인하고, 출산 또는 임신중지를 결정할 여력이 변변치 않을뿐더러 이 과정에 함께할 조력자를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찾았다고 해도 진료나 수술을 받기 위해서는 통역자가 필요한데, 수술 전 검사와 수술 시 고려사항, 주사나 약물에 대한 정보 등을 원활하게 통역해 줄 수 있거나 이 과정에 동행할 수 있는 통역사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럴 때마다 이주민 또는 난민 개인이 지원, 연계 기관을 찾아 병원과 통역자를 구해야만 하는 상황은 '안전하게 임신중지할 권리'와 더욱 멀어지게 한다.
▲ 유산유도제 필수의약품 지정하고 도입하라! 지난 6월 26일,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는 식약처에 유산유도제 필수의약품 지정과 신속한 도입을 촉구하는 다수인 민원 진정서 1,625장을 발송했다. 약사, 의료인들의 다수인 민원에 이은 세번째 다수인 민원이며 식약처장의 책임있는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
ⓒ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보장 네트워크 |
유산유도제 도입으로 안전한 임신중지를
비공식적인 정보와 의료서비스를 방치하고 있는 국가와 정부 부처는 임신중지가 '건강권'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이 공식적인 체계 내에서 임신중지와 관련한 정보와 의료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의료기관을 찾고, 의료서비스를 제공받기 위해 이동이나 통번역 등 필요한 서비스를 원활하게 제공할 수 있도록 연계 시스템 역시 구축해야 한다.
세계보건기구는 각국이 유산유도제의 도입과 보건의료 체계의 연계를 통해 안전한 임신중지에 대한 자율성과 접근성을 높여나가도록 권고하고 있다. 유산유도제를 도입하여 이미 오랫동안 사용해 온 여러 나라에서는 가까운 의료기관에서 약을 처방받고 본인이 필요한 때에 편안한 장소에서 약을 복용한 후, 필요한 경우 다시 의료기관을 방문하여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수술을 통한 임신중지를 할 때보다 병원에서의 절차와 비용 부담을 줄이고, 임신중지가 필요한 당사자가 의료기관과 보건의료인의 연계 하에 보다 안전하고 편안하게 임신중지를 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유산유도제를 이용한 임신중지 또한 건강보험으로 반드시 보장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모임넷)는 지난 5월 15일부터 약 40일 동안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유산유도제 필수의약품 지정과 도입을 촉구하기 위해 다수인 민원 액션을 진행했다. 전국에서 1625명이 진정서를 보내주었고, 6월 26일 광화문 우체국에서 다수인 민원 진정서를 식품의약품안전처로 발송했다.
약사, 의사들의 민원에 이어 시민들의 다수인 민원 제출이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 보장을 위해 지금 당장 유산유도제를 도입하고 임신중지와 관련한 의료서비스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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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 혜원은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사무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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