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도는 쌀…비장의 카드로 꺼내든 ‘가루쌀’ [현장]

맹찬호 2023. 6. 28. 16:0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밀가루 자리 대체 가능한 ‘가루쌀’
수확 후 바로 빻아 가루로 재탄생
수제맥주·튀김·과자 등 다양한 제품화
제조 공정 간소화…비용도 함께 절감
27일 전북 고창군 가루쌀 생산단지 내 논에서 김재국 훈습영농대표가 이양기를 직접 몰고 모내기를 준비하고 있다 ⓒ데일리안 맹찬호 기자

“며칠 전까지만 해도 지난해 심었던 밀 수확이 한창이었죠. 늦은 모내기에도 잘 적응하는 가루쌀은 이모작이 가능해 농작업에 여유가 있어요.”


지난 27일 오후 전북 고창군 가루쌀 생산단지에서 만난 김재국(51) 훈습영농대표는 눈 앞에 펼쳐진 논 앞에서 가루쌀을 설명하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오후 농민들은 송골송골 맺힌 땀을 뒤로하고 가루쌀 모를 본논으로 옮겨심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평소였다면 일반 쌀(멥쌀) 모를 심는 작업이 한창이었겠지만 이양기 옆 트럭에는 가루쌀 모가 그득했다.


김 대표는 직접 이양기(8조식)를 몰며 천천히 모내기를 시작했다. 그는 “가루쌀 재배는 처음이라 아직 어려움도 있지만, 농업기술원 지원으로 극복하고 있다”며 “애정을 가지고 재배한 4개월 뒤 모습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가루쌀은 정부가 쌀 과잉 생산 문제를 해결하고, 밀을 대체하기 위해 개발한 품종이다. 식량 안보와 쌀 수급 균형을 위해 2019년 농촌진흥청이 가공용으로 가루쌀을 내놓았다. 보통 멥쌀과 달리 밀처럼 바로 빻아 가루로 만든다. 가루쌀은 밀가루의 불용성 단백질 성분인 글루텐이 없는 글루텐 프리(Gluten-Free)라는 특징이 있어 가공업체로부터 주목받는다.


생육기간이 일반 벼보다 20~30일 정도 짧은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보통 일반 쌀은 5월 중순에서 6월 중순 사이에 모내기하는데 가루쌀은 6월 말에서 7월 초까지 모내기가 가능해 밀과 이모작이 가능하다. 특히 기존 논을 기반으로 활용이 가능해 농민 부담이 적다.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통계청 조사 이래 가장 낮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56.7㎏으로 전년 대비 0.4%(0.2㎏) 감소했다. 10년 전인 2012년보다는 10㎏ 넘게 줄었다. 40여 년 전인 1985년(128㎏)과 비교하면 절반가량을 소비하지 않는 셈이다.


반면, 작년 쌀 생산은 376만4000t으로 매년 줄고 있다. 2015년 432만7000t이던 쌀 생산량은 2016년 419만7000t으로 감소하고 2017년에는 397만2000t으로 더 줄어 300만t대에 들어섰다. 소비 감소보다 생산 감소 속도가 한참 더뎌 과잉 생산을 초래했다.


27일 오후 전북 고창군 가루쌀 재배단지에서 농부가 이양기로 모내기를 하고 있다. ⓒ데일리안 맹찬호 기자

정부는 밥 대신 면이나 빵을 찾는 식습관을 가진 사람이 늘자 가공에 적합한 쌀 재배를 장려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여름철에 가루쌀을 재배하면 1㏊당 100만원, 밀이나 조사료까지 함께 심으면 최대 총 250만원을 지원하는 ‘전략작물직불제’도 지난 1월부터 시행 중이다. 제도 시행에 따라 논에서 밀, 논콩, 가루쌀 등 전략작물을 재배하는 농업인, 농업법인에 총 1121억원을 지원한다.


정부는 내년부터 가루쌀 상용화에 시동을 걸고 2027년까지 생산량을 20만t으로 늘려 연간 밀가루 수요 10%를 대체하겠다는 계획이다.


이에 제분·가공 업계는 ‘대량 건식 제분’을 통한 비용 절감과 환경 친화에 주목한다. 기존 밥쌀은 딱딱하고 치밀한 전분 구조 때문에 물에 불리는 습식 제분만 가능했다. 또 쌀뜨물 등 폐수가 발생해 처리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반면, 가루쌀은 밀가루 제분설비를 활용해 건식 제분이 가능하다. 별도 생산 라인을 만들지 않아도 기존 설비로 상용화가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전북 고창군에 위치한 파머스맥주에서 관계자가 맥주탱크에 있는 수제맥주를 따르고 있다 ⓒ데일리안 맹찬호 기자

전북 고창군에 위치한 파머스맥주도 가루쌀을 이용해 맥주 가공 공정 시간과 비용을 줄였다. 호남지역에서 생산된 고품질 국산보리와 자체 생산한 맥아를 원료로 수제맥주를 제조하는 업체다. 기존 맥주 제조에서 밥쌀을 사용하면 단단한 탓에 6시간 이상 물에 불려야 했다. 그러나 가루쌀은 바로 분쇄한 뒤 당화조에 투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용선 파머스맥주 대표이사는 “가루쌀은 호화(부피가 늘고 점성이 생기는 현상) 온도가 보리와 유사해 당화조에 함께 넣고 가열이 가능해 공정 과정이 크게 단축된다”며 “개발하는 모든 제품에 가루쌀을 사용해 지역특산주와 보리 발포주 등을 만들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재 파머스맥주 제조시설은 3300㎡(약 1000평)이며 연간 생산량이 300만캔(500㎖)으로 가공부터 양조까지 가능한 곳이다. 전국판매망을 구축해 GS25 편의점에 지역 특산 맥주인 ‘한옥마을’ 맥주를 월 7만개 납품 중이다. 직접 먹어 본 이들은 목 넘김이 부드럽다는 반응이다. 지난 3월부터는 대만에 9만캔을 수출했다. 가루쌀 판매량이 늘고 제품 개발도 성공한다면 가루쌀 이용량도 자연스레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이가자연면 관계자가 27일 쌀가루로 만든 비빔 칼국수를 선보이고 있다. ⓒ데일리안 맹찬호 기자

농협식품도 가루쌀을 활용해 우리쌀칩 등 스낵류와 돈까스, 치킨너겟 등의 튀김류를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 면류 제조업체인 이가자연면도 가루쌀 면을 만들어 기존 밀가루 면 대비 80% 이상 쫀득한 식감을 유지한 제품을 내놓을 계획이다.


한편, 농식품부는 올해 가루쌀 제품개발 지원 사업자로 국내 식품사 15곳을 선정했다. 쌀라면, 쌀로 만든 빵가루 등 밀가루를 대체할 19개 제품이 선보일 계획이다.


농심, 삼양식품 등은 각각 가루쌀을 적용한 라면을 개발할 예정이다. SPC삼립은 파운드케이크 등 4개 제품에 쌀가루를 적용해 본다.


농식품부는 소비자 반응을 보고 성공 여부를 판가름할 방침이다. 기존 쌀 가공식품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힘을 모은다.


안유영 농식품부 가루쌀산업육성반 과장은 “정부가 가루쌀을 매입해 안정적으로 시중에 공급하고, 폭넓은 홍보를 통해 인지도 제고와 유통 확산에도 나서겠다”고 말했다.

Copyright ©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