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Q sign #16] 홈리스를 위한 5분 묵상
노인 아파트에서의 성경공부 후에 ㅇㅇ교회로 가서 예배 전 성경공부와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곳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홈리스들에게 점심 식사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손이 모자라니 평일에도 나와서 거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월요일 낮에 나가보니, 그야말로 배고픈 그들에게 밥을 먹이고는 있었는데….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담임 사역자에게 물었다. “Only food? How about their salvation?”(밥만 먹이나요? 저들의 구원은요?) 라고. 저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일단 밥을 먹이는 게 아니냐고. 내 질문을 받은 담임 사역자가 잠깐 생각을 하더니, 정색하며 내게 물었다. “Then…. can you do that? (그러면, 네가 말씀을 먹일래?)” 전혀 뜻밖의 제의였지만, “I am not good enough in English, but I’ll try to do.”(내 영어가 부족하긴 하지만 해 보겠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렇게 일주일에 세 번, 그들이 식사하기 전에 5분 묵상을 담당하게 되었다. 하루에 점심을 먹고 가는 홈리스들이 대충 100명 안팎이었고, 5분 묵상 시간에 도착하는 인원은 60여 명이었다. 말씀을 나누는 시간이 얼마가 되었든 말씀을 준비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래도 몇 번 정도는 교회에 나갔었고 오며 가며 복음을 접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로서는 매우 심혈을 기울여 말씀을 준비해야 했는데, 그것도 일일이 타이핑을 해서 가지고 갔다. 영어가 입에서 술술 나오지 않으므로. 얼마가 지난 후, 담임 사역자가 내게 다른 제안을 해 왔다. 교회 성도들을 위한 성경공부가 매주 월요일 저녁에 있었는데, 본인하고 교대로 그 성경공부를 인도하자는 것이었다. 성경공부를 인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준비를 해야만 되었다. 찬양과 음료, 한 시간 정도의 성경공부 분량이었다. 역시 타이핑을 해서 가지고 나갔다.
미국에서는 Super Ball Season이 상당히 중요하다. 애리조나 팀이 경기하는 날, 그 날 밤은 함께 모여 TV 시청을 하다가 전반전과 후반전 사이에 유명가수들이 나와서 Show를 시간에 TV를 끄고 이왕에 모인 홈리스들에게 말씀을 전하는데, 그것 역시 나에게 하라고 해서 갑자기 설교를 준비하게 되었다. 하루전에 부탁을 했기 때문에 마음이 조금 분주했는데, 반짝하고 떠오른 설교 제목은 “Anybody vs Somebody(아무나/ 특별한 사람)” 골자는, 대부분 사람을 “아무나”라고 한다면 운동선수들은 “특별한 사람들”이다. 여기 모인 우리는 “아무나”이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특별한 사람이 된다는 결론이었다.
그렇게 하면서 그 해가 지나가고 새해가 왔고,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인 23일 저녁 식사 시간에 Altar call(영접기도)을 준비해 갔다. 날이 날인지라 준비된 음식도 풍성했고 참석 인원도 큰 식당에 가득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에게 오시게 되었는지를 전한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본인의 “Lord and Savior”로 영접하실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하니, 대여섯 명이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그들에게 “fallow me sentence by sentence(내가 하는 문장을 한 문장씩 따라 하라)고 해놓고, ”Father, I am coming to you now.(아버지, 제가 지금 하나님께 나아 왔습니다.)”하는데, 갑자기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앞을 가려서 일어나 복창하는 분들의 얼굴이 보이지가 않았다. 그날 밤에, 결단하고 일어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주님과 구원자로 영접하신 분들은 하나님께서 책임을 져 주시리라 믿는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한복음 1:12, 13)
또 얼마가 지난 후에, 담임 사역자가 홈리스들을 위한 5분 묵상을 아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닷새를 모두 하라고 했다. 나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턱없이 부족하지만 매번 끙끙대고 준비를 하며 감당을 하고 있을 뿐인데 일주일에 다섯 번은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그곳 애리조나 소도시에 가서부터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가 내 나이 만 67세이고 보니 자격도 넉넉하고 병원비 부담이 없게 되었기에. 그리고 아무리 혼자라지만 마켓도 가야 하고, 집에서 할 일들도 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I am not a bending machine(나는 자판기가 아니에요)”라고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웃으면서 말을 했지만 그의 안색이 변했다. 매우 불쾌한 눈치였다. 그렇다고 한들, 그가 제안하는 모든 일을 모두 “Yes!”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람들은 꼭 이렇게 한계를 넘어 쳐들어온다. 본인 자신을 다스리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상대방을 자기의 뜻대로 복종시키기를 원한다. 어림도 없는 발상이다.
그 후로부터 뭔가 이상 해졌다. 5분 묵상 시간에 가면 사람들이 몇 명 보이지 않았다. 대충 60여명이었던 사람들이 열 댓명 밖에 없었다. “웬일일까?” 생각이 들었지만, 담임 사역자가 교묘하게 시간을 바꿔서 그렇게 된 일인지는 그런 상태로 두어 달이 더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주일에 닷새를 그렇게 하고 싶었다면 이틀 정도는 본인이 감당해도 될 일이었다.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 담임 사역자가 고의로 복음을 방해하다니. 너무 실망스러웠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태복음 23:13)
홈리스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슬펐지만 가는 일을 멈추었다. 다른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부 사역자가 집으로 찾아왔지만 되돌아가지 않았다. 길 가다가 만나는 다른 봉사자가 “왜, 안 오느냐?”고 물었지만 차마 사실을 말할 수 없어서 그냥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그다음에, 길을 오며 가며 보았던 Hospice Care Volunteer를 구한다는 광고가 붙은 사무실로 찾아갔다. 몇 날 몇 시에 Training이 있으니 오라고 해서 찾아가 훈련을 받았다. 훈련은 한 번만 받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후에 보니, 봉사하면서도 주기적인 훈련은 계속되었다. 첫 번째 훈련을 받고 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코디네이터로부터 연락이 왔고 첫 번째 의뢰인인 Betty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예쁘고 얌전한 할머니였다. <계속>
◇김승인 목사는 1947년에 태어나 서울 한성여고를 졸업하고 1982년 미국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LA 기술전문대학, Emily Griffith 기술전문대학을 나와 패션 샘플 디자인 등을 했다. 미국 베데스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북미총회에서 안수받았다. 나성순복음교회에서 행정 비서를 했다. 신앙에세이를 통해 문서선교, 캘리포니아에 있는 복음방송국(KGBC)에서 방송 사역을 했다.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논픽션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했다.
정리=
전병선 미션영상부장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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