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 몸에 여자 가슴을? 이현세 웃게 한 드로잉 천재 문하생
“만화가에게 인공지능(AI)이 재앙이 될 수도 있겠죠. 모두가 그림을 잘 그릴 수 있게 되면, 결국 독창적인 스토리텔링으로 경쟁해야 할 테니까요. 하지만 이미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1978년 데뷔 이후 ‘공포의 외인구단’ ‘떠돌이 까치’ ‘남벌’ 등 한국 만화계를 이끌어온 만화가 이현세(69)가 최근 창작자들 사이에서 화두로 떠오른 AI 사용에 대해 밝힌 소회다. 지난 22일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출판 만화도 서서히 없애진 게 아니라 한순간에 쓰나미처럼 사라졌다”며 “컴퓨터와 디지털 변화에 밀려난 경험이 있기 때문에 AI 기술의 진보가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현세가 택한 것은 자신의 스타일에 특화된 AI 모델을 만드는 방식. 지난해 10월부터 웹툰 제작사 재담미디어와 손잡고 44년 동안 그린 작품 4174권 분량의 만화를 스테이블 디퓨전 등 여러 이미지 생성 AI 프로그램을 활용해 학습시키고 있다. 일본에서도 데즈카 오사무(1928~1989)의 신작 ‘파이돈’이 발표되거나 ‘블랙잭’을 재연재하는 등 다양한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들과 달리 이현세는 자신의 과거 작품을 AI에 학습시켜 직접 크리에이터로 참여하는 게 차별점이다.
AI 학습 과정을 지켜본 이현세는 “학습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며 “5~6개월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델”이라고 감탄했다. 하지만 장단점도 명확하다고 평가했다. 크로키로 대충 그려놓은 걸 정교하게 표현해내는 솜씨는 일품이지만, 일일이 정확한 명령어를 입력하지 않으면 손가락을 3~4개만 그린다거나 남자인 ‘까치’ 몸에 여자 가슴을 그려놓는 등 오류도 종종 발생한다. 그는 “인간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다. IQ는 엄청나게 높은데 EQ가 전혀 없는 사람 같다”며 웃었다.
AI를 활용할 첫 작품은 ‘고교 외인부대’다. 연내 중편 길이의 작품을 리메이크하는 방식으로 AI의 실력을 테스트해본 다음 다른 작품으로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이현세가 가장 기대하고 있는 것은 ‘천국의 신화’다. 1997년 선정성 논란이 일면서 미성년자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6년간 재판 끝에 무죄 판결을 받고, 2015년 네이버웹툰에서 연재를 재개했으나 마무리하지 못한 ‘아픈 손가락’이다. 그는 “오랜 팬들은 ‘옛날 그 맛이 안 난다’고 하고, 젊은 층에서는 ‘올드하다’고 했다. 결국 연재를 중단했는데 AI를 통해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나이가 들수록 손에 힘이 빠지고 그림체가 바뀌는 것도 그가 AI에 마음을 연 이유 중 하나다. 그는 “10년 주기로 그림체가 바뀌었다. 작품 장르에 따라 표현 기법을 바꾸다 보니 옛날 방식으로 그리려고 해도 할 수 없었는데 AI는 가능하다고 하니 솔깃했다”고 밝혔다. 이어 “내가 죽고 난 뒤에도 내 스타일과 관점이 반영된 작품이 계속 나올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재밌을 것 같다”며 “그 역시 10년 단위로 바뀔지 궁금하다”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원로 만화가들이 AI를 활용해 현업으로 복귀할 가능성도 있다. 이 작가는 “지금 내 또래 중 작품 활동을 계속하는 건 장태산 작가와 나밖에 없는데 이미 자신의 스타일이 확실하게 구축된 경우엔 나처럼 새로운 꿈을 도모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석환 재담미디어 전략사업본부 이사는 “이현세 AI 프로젝트가 어느 정도 성과를 내면 이현세 화실 출신 작가들로 범위를 확대해 보완 학습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만 이현세는 처음부터 AI를 사용해서 그리는 것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여전히 수작업을 고집하는 그는 “학교(세종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니 컴퓨터로 그려보긴 했는데 손으로 그리는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며 “도저히 손으로 그릴 수 없을 때가 오게 되면 모르지만 고스란히 흔적이 남는 종이가 좋다”고 말했다. “AI와 협업을 통해 기존 작품을 활용하는 것은 흥미롭지만 새 작품을 창작할 때 AI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웹툰 산업을 바꾸고 있는 AI 임팩트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더중앙플러스 팩플 오리지널의 ‘AI가 없애는 게 노가다? 웹툰 작가들이 찜찜한 이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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