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지 않고 가깝고 맛있다…한여름 두 달 살아버린 '눈의 도시' [10년째 신혼여행]

손민호 2023. 6. 28.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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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째 신혼여행③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


눈의 도시 삿포로는 여름에 진가를 발휘한다. 한여름에도 가을 아침 같이 선선해 상쾌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부랴부랴 6월 연재도시를 바꾸기로 했다. 여름 휴가철이 다가올수록 독자 요구가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가깝고 맛있고 무엇보다 덥지 않은 여름 휴가지는 어디일까요?” 가깝고 맛있는 도시만 찾자면 방콕·발리·타이베이·다낭 등 줄지어 읊을 수 있다. 하지만 ‘여름에 덥지 않은’이라는 단서가 붙는다면 답안의 폭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가? 전 세계에서 무려 46번의 한 달 살기를 한 부부 아닌가? 전 세계 도시 날씨를 꿰뚫고 있는 우리 부부에게 위의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도시, 매번 여름 휴가지로 선택하는 그곳을 공개한다. 바로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다. 이 도시에서는 이례적으로 두 달 살기를 했다.

아내의 삿포로


삿포로 시내의 지하 도시. 삿포로의 한겨울 적설량은 어마어마하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불편 없이 생활할 수 있게 지하 도시가 발달했다.
2016년 여름, 서울을 떠나 삿포로로 향한 건 순전히 종민의 고집 때문이었다.

2년간의 세계여행을 마치고 다시 정착한 동네는 서울 망원동. 한강이 코 앞이라 종민은 매일 나가 달리기를 했고, 어쩌다 보니 런클럽도 부지런히 쫓아다니는 열혈 러너가 되어 있었다. 그다음 수순은 뻔했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면서 극도의 희열, 러너스 하이를 갈망하게 된달까.

덕분에 나도 하프 코스를 완주했다. 달리는 희열을 갈구하는 사이 여름이 왔고 종민은 풀코스를 계획하고 있었다. 여기엔 생각지도 못한 제약이 있었는데, 마라톤 대회 개최 시기는 날씨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었다. 생각해 보시라. 뙤약볕 아래 아스팔트를 걷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데, 그 위에서 42.195km나 뛴다는 게 말이 되는가. 고로 한여름에 열리는 마라톤 대회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나라에서 찾기 어렵다. 그러다가 삿포로를 발견했다.

그 삿포로? 눈의 도시? 맞다! 일본 열도 가장 북쪽에 있는 섬, 홋카이도의 최대 도시 말이다. 여름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덥고 습한 건 매한가지 아닐까 의심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 한여름에도 30도를 넘기는 날을 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도시가 삿포로라고. 이런 날씨 덕분에 한여름에 흔치 않은 국제 규모 마라톤 대회가 해마다 열린다.

수프 카레는 삿포로에서 시작된 홋카이도 사람의 소울 푸드다. 카레로 끓인 국인데 추운 겨울, 언 몸을 녹이기에 그만이다.

7, 8월이 덥지 않다는 건 겨울이 길고 춥다는 뜻이기도 하다. 삿포로는 눈이 많이 내리기로 유명한데, 시내 중심에 폭설을 대비해 건물과 건물, 지하철 플랫폼을 오갈 수 있는 지하 도시도 만들어 놨다. 이런 혹한의 추위에서 사람들의 몸을 녹여주고자 이 고장에서 시작된 음식이 바로 수프 카레다.

사실 나는 카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삿포로에 있는 동안 이틀에 한 번꼴로 수프 카레를 찾아다닐 정도로 푹 빠져 버렸다. 수프 카레는 일반 카레와 달리 국물 가득한 소스 위에 바삭하게 튀기거나 구운 큼지막한 고명을 올려 먹는다. 야채·닭고기·양고기 등 원하는 토핑을 자유자재로 올릴 수 있다. 김치찌개 맛이 가정마다, 식당마다 다르듯이 하늘 아래 같은 맛을 내는 수프 카레 식당이 없다.

볕 좋은 가을 아침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선선한 삿포로 여름 공기를 가르며 종민은 매일 뛰었다. 나는 그 옆을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졸졸 따라다녔다. ‘괜찮은 수프 카레 식당이 어디 없나?’ 하고 말이다.
김은덕 think-things@naver.com


남편의 삿포로


아시아에서 드물게 한여름에서 열리는 홋카이도 마라톤 대회는 반듯한 삿포로 시내를 달리는 재미가 있다.
그 정도 뛰었으면 당연히 마라톤 풀 코스를 완주할 줄 알았다. 그래서 삿포로로 가자고 고집을 부렸다. 그것도 두 달이나!

반듯한 삿포로 도로를 달리며 단련하는 사이, 마침내 마라톤 대회 아침이 밝았다. 내가 속한 그룹은 출발 신호가 울리고 난 뒤에도 한참이나 있다가 출발했다. 조급해하지 않았다. 쉬지 않고 뛰면 결국 결승점에 도착한다는 생각으로 달렸다. 그렇다. 기록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그저 ‘뭐 하나에 꽂혔다 하면 의욕만 앞선다’는 은덕의 핀잔을 보란 듯이 꺾고 싶었을 뿐이다.

삿포로 시내와 홋카이도 대학 교정을 가로지르고 나니 제방을 따라 긴 직선도로가 나왔다. 저 멀리 반환점이 있는지 사람들이 반대편으로 달리고 있었다. ‘곧 절반이다. 지금처럼만 달리면 완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수프 카레를 먹을까? 미소라멘을 먹을까?’ 고민할 여유까지 생겼다. 하지만 이 모든 게 한순간 무너지고 말았다.

다시 말하지만, 난 체력 안배를 너무 잘해서 힘이 남아 있었고 마라톤이 끝난 뒤 뭘 먹을지 고민 중이었단 말이다. 그런 내 앞에서, 정말 코앞에서 진행 요원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나를 비롯해 뒤를 따르던 모두를 멈춰 세웠다. 처음에는 경기가 중단될 만한 중대한 사건이 벌어진 줄 알았다. 참가자들이 순순히 진행 요원의 지시에 따르는 동안 한국에서 온 외국인만이 지금 이 사태를 파악하느라 눈알을 굴릴 뿐이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반환점을 통과하지 못하면 더이상 뛸 수 없다는 걸 파악하고 나서야 “나는 더 뛸 수 있다”고 우겼다. 하지만 진행 요원은 일본인 특유의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스미마셍(죄송합니다)”을 외쳐 댈 뿐이었다. 일본인의 저 깍듯한 예의 바름이 이토록 얄미운 적이 없었다. 그렇게 떠밀려 올라탄 버스 안의 모두는 패잔병처럼 아무 말 없이 창밖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일본 3대 온천으로 불리는 노보리베츠는 마을 가운데 자리한 지옥계곡으로 유명하다. 매캐한 유황 연기와 수증기가 늘 뿜어져 나온다.

다음 날, 노보리베츠 온천마을을 찾았다. 일본 3대 온천으로 러일 전쟁 때 부상병을 치료했다는 영험한 곳이다.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을 온천으로 달랠 심산이었다. 그동안 애써 준비하고 달렸다고 발톱은 멍들었고 허벅지는 무거웠고 피부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 있었다. 진짜 약효가 있는 온천수라는 걸 깨닫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 날 부기가 가라앉고 한 달 가까이 낫지 않던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으니까.

삿포로는 그 유명한 삿포로 맥주의 본산이다. 돔구장에 앉아 시원한 컵맥주를 마시며 야구 경기를 즐겨보자.

남은 날은 맥주 축제를 찾아가 삿포로 맥주를 신나게 마시고, 홋카이도 우유로 만든 케이크·아이스크림·푸딩·초콜릿을 먹으러 다녔다. 삿포로 돔구장을 찾아가 홈팀 ‘니혼햄 파이터스’의 오타니가 홈런을 치는 것도 직관했다. 그렇게 놀고먹었다. 두 번 다시 뛰지 않을 사람처럼.
백종민 alejandrobaek@gmail.com

■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 한 달 살기 정보

계획도시로 설계된 삿포로는 온 시내를 자로 그은 듯한 격자형 도로가 특징이다. 한 달 살기라면 중고 자전거를 한 대 구입하는 것도 방법이다.

비행시간 : 2시간 30분
날씨 : 겨울이 매우 길고 눈이 많이 오지만 여름은 쾌청하고 선선함(한낮은 반소매 차림도 무리 없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얇은 겉옷 필요)
언어 : 일본어(도쿄·오사카 등 다른 대도시만큼 영어가 통하지 않음. 번역 앱을 사용하는 것도 방법)
물가 : 도쿄보다 조금 저렴한 수준(현지 생산되는 농수산물 가격은 저렴하지만 다른 지역에서 오는 청과물 가격은 비쌈)
숙소 : 월 800달러 이상(집 전체, 시내 중심부에서 30분 내외. 엔화가 내렸다고 해도 숙소비는 여전히 비싼 편)

■ 여행작가 부부 김은덕, 백종민

한시도 떨어질 줄 모르는 작가 부부이자 유튜버 부부. ‘한 달에 한 도시’씩 천천히 지구를 둘러보고, 그 경험의 조각들을 하나씩 곱씹으며 서울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마흔여섯 번의 한 달 살기 후 그 노하우를 담은 책 『여행 말고 한달살기』를 출간했다. 지은 책으로 『사랑한다면 왜』 『없어도 괜찮아』 『출근하지 않아도 단단한 하루를 보낸다』 등이 있다. 현재 미니멀 라이프 유튜브 ‘띵끄띵스’를 운영하며 ‘사지 않고 비우는 생활’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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