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 태어나줘서 고맙지 않은 존재는 없다

한승주 2023. 6. 28.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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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기록 있으나 출생 신고
안 돼 사라진 아이 2236명
일부는 살해당하거나 버려져

등록 안 된 아이 안 찾은 정부
출생 기록 통보 반대한 병원
법안 논의 안 한 국회의 책임

출생통보제·보호출산제 필요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
학대받는 아이들 다 찾아야

18XXXX-4. 아기는 이렇게 불렸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병원에서 붙여준 임시신생아번호였다. 출생 직후 B형간염 예방접종을 마쳤다는 기록이다. 원래대로면 아기는 한 달 안에 이름을 얻고, 출생신고가 돼 주민등록번호를 받아야 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정식 등록돼 사회안전망에 들어와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친모로부터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2019년 이 엄마에게서 태어난 또 다른 아기(19XXXX-3)도 같은 운명이었다. 경찰은 지난주 경기도 수원의 한 가정집 냉장고에서 영아 시신 2구를 찾았다. 출생을 축복받기는커녕 태어나자마자 살해당하거나 인터넷을 통해 모르는 이에게 팔린 아기들의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태어난 기록은 있으나 출생신고가 안 돼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아이들이 2236명이다. 이 기간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이들이 1000여명. 이를 감안한다고 해도 1000명 넘는 아이들의 행방이 묘연하다.

정부는 마치 이런 일을 전혀 몰랐다는 듯 분주하게 대책을 마련 중인데 뒷북도 이런 뒷북이 없다. 영·유아를 상대로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개인도 문제지만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한 정부와 병원, 정치권 모두 책임이 크다. 우선 정부. 보건복지부는 알고 있었다. 병원이 부여하는 임시번호와 주민등록번호를 대조하면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아이들의 실태를 알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한 번도 조사하지 않았다. 개인정보보호 위반이라는 이유로, 조사에 강제성이 없어 부모가 거부하면 그만이라는 핑계로. 그러는 동안 2000명이 넘는 아이들이 사라졌다. 직무유기다.

의료기관의 책임도 크다. 병원은 행정기관에 출생 기록을 통보할 의무가 없다. 부모에게 한 달 내에 출생신고를 하라고 알려주는 게 전부다. 부모가 안 해도 정부는 알 도리가 없다. 만약 법적으로 병원이 출생을 의무적으로 통보하도록 하는 시스템이 갖춰졌다면 태어나고도 행정기록에 누락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병원은 이 같은 ‘출생통보제’에 반대했다. 행정 비용과 책임 부담이 커진다는 이유였다. 그러면서도 신생아 접종으로 얻는 실익은 챙겼다. 병원이 접종 기록을 제출하면 질병관리청이 지원금을 주기 때문이다. 즉 출생아로 인한 돈은 빠짐없이 챙기면서도 출생 등록 책임은 거부해온 셈이다.

정치권도 할 말이 없다. 21대 국회 들어 출생통보제 관련 법안이 15건이나 발의됐으나 여야는 단 한 번도 논의하지 않았다. 정쟁에 몰두하느라 민생법안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국가 소멸을 걱정하며 저출생·고령화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외치면서도 기본적인 출생신고 등록시스템 구축은 외면해온 것이다. 이것이 저출생 문제에 수년간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으면서도 정작 출생아 관리조차 못한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미국 영국 독일 등 선진국은 출생통보제를 시행하고 있다. 출생신고가 안 된 아기는 방임이나 학대에 노출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출생통보제를 보완하기 위한 ‘보호출산제’도 필요하다. 미혼모나 불법체류자 등 출산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산모는 익명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또 임시신생아번호에 산모의 기록을 추가하도록 시행령이 개정되면 영아 대상 범죄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모든 제도가 도입된다 해도 연간 100~200건에 이르는 병원 밖 출산 아기를 놓칠 위험은 존재한다. 이에 대한 대책 마련도 시급하다. 국회는 이르면 이번 주 관련 법을 통과시킬 예정이다. 서두르되 분노한 여론에 떠밀린 졸속 입법은 안 된다. 꼼꼼하게 법제화하고, 안전 사각지대는 없는지도 빈틈없이 살펴야 한다.

영화 ‘브로커’는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기를 빼돌려 돈을 받고 팔아넘기려는 이야기다. 영화에서 아이를 버렸지만 다시 찾으러 온 소영(이지은)은 아기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불이 꺼진 어둠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성아, 태어나줘서 고마워”라고. 세상에 태어나줘서 고맙지 않은 존재는 없다. 그럼에도 태어나서 한 번도 이런 얘기를 듣지 못하고, 하늘의 별이 되어 버린 아이들이 있다. 물건처럼 쓰레기통에 버려지거나 모르는 이에게 팔린 아이들이 있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학대당하고 있을 아이들도 있다. 정부가 사라진 아이 전부를 다 조사하겠다고 한 만큼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찾아내야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멈추지 않길 바란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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