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상택 (2) 몽골 일본군 사령부서 일하던 부친, 가족과 목숨 건 탈출

우성규 2023. 6. 28.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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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41년 내몽골 자치구 장자호에서 태어났다.

내가 몽골에서 태어난 것은 선친께서 그곳에 주둔한 일본군 사령부의 수의사 겸 검식관으로 근무했기 때문이다.

독립군 지원사건 말고도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에 대한 아버지의 회의적 입장이 몽골을 떠나는 결단에 이르게 했다.

당시 아버지는 주권을 빼앗긴 조선의 청년으로서 비록 몸은 몽골에 주둔한 일본군에 예속돼 있었으나 마음은 아시아 전역을 전쟁터로 만든 일제의 만행을 혐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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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대 나온 수의사 겸 검식관
군수품 보급·식품 관리하며
독립군 자금 대주다 발각 직전 탈출
꿈에 그리던 고향 정착했지만 6·25 터져
이상택(앞줄 가운데) 박사가 부모님, 아내 황영희(뒷줄 오른쪽부터) 박사 및 두 아들과 더불어 1972년 충남 아산 현충사에서 가족여행을 하고 있다.


나는 1941년 내몽골 자치구 장자호에서 태어났다. 조국 광복을 4년 앞둔 4월의 봄날이었다. 내가 몽골에서 태어난 것은 선친께서 그곳에 주둔한 일본군 사령부의 수의사 겸 검식관으로 근무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일본 도쿄수의전문학교(현 도쿄대 축산과)를 차석으로 졸업한 엘리트였다. 당시 일본에서 유학한 우리 선조들은 식민지 백성으로 차별을 받아 아무리 성적이 우수해도 언제나 차석을 줄 뿐 수석은 일본인이 차지하는 현실이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군수물자 보급 담당을 겸하여 식량 파트의 식품검열관으로 1945년 7월까지 근무하셨다. 아버지는 일본군 지휘부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 맡은 임무가 군수품 보급과 식품 관리라는 요직이어서 나는 퍽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는 동족들이 늘 우리 집을 찾아와 매일 잔치를 하듯 떠들썩한 분위기였다는 점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들 중에는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군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들에게 은밀히 독립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다.

나는 해방을 불과 한 달 앞둔 1945년 7월 몽골을 떠나 9월에 조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대륙을 무대로 활동하던 독립군들을 은밀히 도와 오셨는데 그것이 부대에 있는 헌병대에 의해 그만 탄로가 난 것이다. 헌병대 체포 직전 가족을 데리고 몽골을 탈출하게 됐다. 평소 어려운 동료들을 돌봐준 덕에 체포조가 들이닥칠 것이란 정보를 누군가 아버지에게 전해 주었던 것이다. 잡히면 영락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리 가족은 안정된 삶의 터전을 버리고 몽골을 떠나야만 했다.

독립군 지원사건 말고도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에 대한 아버지의 회의적 입장이 몽골을 떠나는 결단에 이르게 했다. 당시 아버지는 주권을 빼앗긴 조선의 청년으로서 비록 몸은 몽골에 주둔한 일본군에 예속돼 있었으나 마음은 아시아 전역을 전쟁터로 만든 일제의 만행을 혐오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 무렵 아버지는 일본이 머잖아 패망할 것이라는 정세도 파악하셨다.

아버지의 빠른 판단과 정확한 행동으로 그해 7월, 가족은 중국 베이징으로 탈출해 8월 상하이에서 조국의 해방 소식을 듣게 됐다. 상하이에서 단둥으로 올라가 신의주를 거쳐 다롄에서 배를 타고 9월에야 꿈에 그리던 인천으로 귀국했다. 잡히면 끝장나는 생사를 건 탈출이었지만, 아버지는 온 가족을 이끌고 자유를 찾아 나선 모험에 성공했다.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얼마간 생활하다가 1946년 가을 고향인 경남 양산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양산군청 축산과장으로 영입됐고 이후 밀양군청에서도 일하셨다. 곧이어 6·25전쟁이 발발했다. 아버지는 군청의 종축장 시설을 딱한 사정의 피난민들에게 머물도록 조처하신 이유로 음해를 받아 군청에서 파면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아홉 남매 가운데 장남이던 내게 가정을 이끌 책임이 주어졌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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