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반복의 미학… “매일 새롭게 나아갈까 고민”

손영옥 2023. 6. 27.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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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의 단색화 거장 정상화
갤러리현대서 ‘무한한 숨결전’
작품 ‘무제 84-3-8’(1984) 앞에 앉은 정상화 작가. 구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 작가는 한국 미술시장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미술 장르인 단색화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갤러리현대 제공


“어떤 분야든 노력이다 노력이 없으면 이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요 한마디는 자신 있게 말하고 싶습니다.”

한국 미술시장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미술 장르인 단색화(1970년대 태동한 중성색의 추상화)의 대표 주자인 정상화(91) 작가. 그가 서울 종로구 삼청동 갤러리현대에서 갖는 개인전에 미술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달 초 개막일에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10년 만에 갤러리현대에서 갖는 전시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인터뷰 도중 몇 번에 걸쳐 ‘노력’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작가는 ‘뜯어내기’와 ‘메우기’라는 자신만의 독창적 방식을 발표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업은 흰색, 청색, 검정색 등 단색 화면을 이루는 무수히 많은 격자로 구성돼 있다.

격자는 불규칙하다. 그 불규칙한 틈새가 주는 무심해 보이는 여유가 작품이 주는 매력이다. 가까이 가서 보면 캔버스에 격자 무늬를 그려 넣은 것이 아니다. 제작 기법이 특이하다. 캔버스에 3∼5㎜ 두께로 고령토를 바른 뒤 캔버스 뒷면에 줄자를 대 격자무늬를 긋는다. 그러곤 그 무늬대로 접으면 고령토가 네모꼴로 불규칙하게 떨어져나간다. 작가는 떨어져서 비어진 홈을 유채나 아크릴 물감으로 채워 넣는다. 그 결과 그의 캔버스는 네모꼴들이 서로 인접하면서 빡빡하게 쌓이고 무한히 확산해 가는 ‘은밀한 숨결의 공간’을 만들어낸다고 미술평론가 이일은 평한 바 있다. 2차원의 캔버스 평면을 고령토라는 흙을 사용함으로써 숨결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체력이 아주 소모되는 작업이라 조수를 쓸 법 하건만 그는 구순이 넘은 나이에도 수행하듯 혼자 작업한다. 200호 대작 한 점을 마치려면 6개월이나 걸리는데도 말이다.

“내 작업은 자동적으로, 무작위적으로 확 덜어내고 메워야 해. 1단계 끝나고 2단계 시작하고 하는 그런 게 아니야. 내 혼자 해야 이런 작품이 돼요.”

작가는 이렇게 말하면서 “매일 매일 새로운 걸 하려는데 쉽지 않다. 매일 어떻게 새롭게 나아갈까 고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노력을 강조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정상화 개인전 전시장 전경. 갤러리현대 제공


이번 갤러리현대에서 하는 ‘무한한 숨결’전은 작가와 갤러리가 아홉 번째 호흡을 맞춘 개인전이다. 갤러리현대는 그가 파리에서 활동 중이던 1983년에 첫 개인전을 개최한 이후 현재까지 40여 년간 그의 예술 세계를 국내외 무대에 알려 왔다. 이번 전시에는 독보적인 표현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1970년대 작품부터 근작까지 40여점이 대거 나왔다.

경남 마산에서 유년기를 보낸 작가는 서울대 수의과에 시험 보러 간다고 거짓말하고 올라와 미대에 응시했다. 미대 입학 사실은 한 학기 만에 들통이 났다. 부친이 등록금을 대주지 않아 형이 도와줬다고 작가는 회상했다.

졸업 후 전후의 청년 예술가들을 사로잡았던 앵포르멜(전쟁 상흔을 담은 비정형의 끈적끈적한 추상화)에 빠졌다. 그는 1965년 파리 비엔날레, 1967년 상파울루비엔날레 참여 작가로 선정되면서 해외 미술계에도 소개됐다. 이를 계기로 1년 간 파리에 머물다 왔고, 이 시기에 작품 속에 평면적인 시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귀국한 그는 한국에 머물러 안온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기보다 세계 미술 흐름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고자 1969년 일본 고베로 건너간다. 고베에서 비정형의 추상화인 앵포르멜에서 벗어나 회화의 평면성을 추구하며 여러 실험을 하던 끝에 ‘뜯어내기’와 ‘메우기’ 식의 현재의 방법론을 만나기에 이른다.

그는 1977년 다시 프랑스로 이주한 뒤 이전의 백색 격자무늬 작품에서 나아가 검은색, 푸른색, 적색 등 다양한 색의 단색화를 선보인다. 이어 1992년 영구 귀국해 1996년 경기도 여주에 작업실을 짓고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왼쪽은 ‘무제 12-5-13’(2012), 오른쪽은 ‘무제’(1989). 갤러리현대 제공


이번 전시에는 완성작 뿐 아니라 그만의 독특한 화면 구축 방법론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도 나왔다. 또 프로타주 작업과 목판 작업 등 새로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다양한 연작들도 만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예술성과 시장성을 동시에 갖춰 현재 생존 작가 가운데 작품 가격이 10억원이 넘는 작가 3명 중 한 명에 속한다.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2021), 런던 레비고비 갤러리(2020), 뉴욕 레비고비 갤러리(2016), 갤러리현대(2014), 프랑스 생테티엔 현대미술관(2011)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도쿄현대미술관, 미국 스미스소니언의 허쉬혼 미술관, 프랑스 생테티엔 현대미술관, 홍콩 M+, 구겐하임 아부다비 등 국내외 유수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7월 16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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