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주석중 교수 책상 밑에 남은 ‘생라면 헌신’ 흔적

오주환 2023. 6. 27.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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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기도문
조문객들이 지난 19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주석중 서울아산병원 심장혈관흉부외과 교수 빈소에서 조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진 고(故) 주석중 서울아산병원 심장혈관흉부외과 교수의 연구실 책상 아래에는 라면 스프가 널려 있었다고 유족이 전했다.

주석중 교수의 장남 주현영씨는 이런 소식을 전하며 “평소 아버지가 제대로 식사할 시간을 내기도 어려워서, 아니면 그 시간조차 아까워서 연구실 건너 의국에서 생라면을 가져와 면만 부숴 드시고 스프는 그렇게 버려둔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로지 환자 보는 일과 연구에만 전심전력을 다하시고 당신 몸은 돌보지 않던 평소 아버지의 모습이 그대로 느껴져 너무나 가슴 아팠다”고 했다.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26일 페이스북을 통해 주씨가 유족을 대표해 추모객들에게 전한 감사 메시지를 공개했다. 주석중 교수와 관련된 여러 일화들이 소개됐다.

주씨는 “여러분께서 따뜻한 위로와 격려로 저희와 함께해 주신 덕분에 아버지 장례를 무사히 마쳤다”며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별이라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프고 비통했지만, 정말 많은 분께서 오셔서 아버지가 평소 어떤 분이셨는지 얘기해 주시고, 진심 어린 애도를 해 주셔서 가족들에게 큰 힘이 됐다”고 했다.

고 주석중 서울아산병원 심장혈관흉부외과 교수. 연합뉴스


주씨는 또 “(주석중 교수 연구실 내) 정리되지 않은 채 뒤섞여 있는 서류들 속에는 평소 사용하시던 만년필로 직접 쓴 몇 개의 기도문이 있었다”고 알렸다.

이어 “벽에 있는 작은 게시판에도 기도문 한 장이 붙어 있었다”며 “영문으로 쓴 그 기도문 한 구절은 이렇다. ‘…but what can I do in the actual healing process? Absolutely nothing. It is all in God’s hands(하지만 실제 치유 과정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정성을 다해 수술하고 환자를 돌보지만 내 힘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 하나님께서 도와주십사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을 그렇게 적어두신 듯하다”고 해석했다.

주씨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 어머니께 뜬금없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나는 지금껏 원 없이 살았다. 수많은 환자들 수술해서 잘 됐고, 여러 가지 새로운 수술 방법도 좋았고, 하고 싶은 연구 하고, 쓰고 싶었던 논문 많이 썼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소명을 다한 듯하여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했다.

이어 “마치 당신의 운명을 예감 아닌 예감이라도 하셨던 것일까요. 저희는 아버지의 자취가 너무나 그리울 것 같다”고 추모했다.

지난 20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주석중 서울아산병원 심장혈관흉부외과 교수의 발인이 엄수되고 있다. 연합뉴스


아울러 주씨는 “아버지 빈소가 마련된 첫날 펑펑 울면서 찾아온 젊은 부부가 있었다”고 전했다.

주씨는 “(부부는) 갑작스러운 대동맥 박리로 여러 병원을 전전하였으나 어려운 수술이라며 모두 기피하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저희 아버지께서 집도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었노라며 너무나 안타까워하시고 슬퍼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무리 위험한 수술이라도 ‘내가 저 환자를 수술하지 않으면 저 환자는 죽는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감당해야지 어떡하겠냐’고, ‘확률이나 데이터 같은 것이 무슨 대수냐’고 그러셨던 아버지 말씀이 떠올랐다”고 했다.

주씨는 “많은 분께서 저희 아버지를 누구보다 따뜻하고 순수한 가슴을 지닌 사람으로 기억해 주셨다. 여러분이 기억해 주신 아버지의 모습과 삶의 방식을 가슴에 새기고, 부족하지만 절반만이라도 아버지처럼 살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귀한 걸음 하셔서 아버지 가시는 길 배웅해 주시고 위로해 주신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고 했다.

주석중 교수는 지난 16일 오후 1시20분쯤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패밀리타운 아파트 앞 교차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려다 우회전하던 덤프트럭에 치여 사망했다. 그는 평소 병원 10분 거리에 살면서 응급 수술을 도맡았다.

앞서 노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주석중 교수를 추모하며 “국내 대동맥 수술의 수준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린 ‘탁월하고 훌륭한’이라는 단어로 표현해낼 수 없는 인재 중의 인재”라고 평가했다.

이어 “이런 인재는 대체가 불가능하다. 이 ‘탁월하고 훌륭한’이라는 표현으로 부족한 인재의 부재로 인해 누군가는 살아날 수 있는 소생의 기회를 잃게 될 것”이라고 탄식했다.

그러면서 “유능한 의사의 비극은 한 사람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늘의 뜻이겠지만, 인간의 마음으로는 너무나 슬픈 일”이라고 했다.

오주환 기자 john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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