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미·중 갈등하면서도 기업은 교류하는 까닭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지만, 미국은 일본의 전후 복구를 도왔다. 6·25전쟁 동안 미국의 병참 기지로 자리 잡은 일본이 경제 대국이 되고 미국의 가장 가까운 우방이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이 너무 커지는 것을 좌시하지 않았다. 1985년 9월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일본 등 주요 5개국(G5) 재무장관은 미국 달러에 대한 일본 엔화의 환율을 조정하는 데 합의했다. ‘플라자 합의’로 알려진 이 결정을 통해 엔화 가치가 2배 이상 폭등했다. 갑작스러운 엔화 가치 상승으로 일본의 수출이 한풀 꺾였다. 그로부터 ‘잃어버린 20년’이라 부르는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가 시작됐다.
■
「 국익에 앞서는 건 아무 것도 없어
국가 생존, 선도 과학기술에 달려
반도체 등 기술 있으니 한국 주목
세계 최고 기술 확보가 우리 살 길
」
1978년 12월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 수많은 중국의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선진 기술을 습득했다. 1979년 1월 미·중 수교 이후 미국도 중국의 경제 발전을 도왔다. 그러나 중국이 경제 몸집을 G2 수준으로 불리면서 시진핑 체제 들어 미국 중심 세계질서에 도전하자 미국의 대중 정책은 급선회했다. 중국에 대해 압도적 기술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은 ‘반도체와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등을 통해 천문학적 연구개발 예산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또한 첨단기술의 중국 유출을 막기 위해 각종 규제로 중국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정치적으로 두 나라가 날 선 대립을 계속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국 국무장관이 5년 만에 중국을 방문하는 등 대화 제스처로 국제사회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민간 차원에서도 미묘한 흐름이 나타났다.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 중 하나인 테슬라가 상하이에 대용량 배터리인 ‘메가 팩’ 공장 증설 계획을 발표했다. 시진핑 주석은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를 만났는데, 코로나19 사태 이후 시 주석이 외국 기업인을 만난 것은 게이츠가 처음이라고 한다.
이렇게 대한민국을 둘러싼 최근의 지정학적 현상에서 보듯이 국제 관계에서 국익에 우선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초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주권을 지키고 경제적 성취를 이어나가려면 우리의 존재 가치를 키워야 한다. 그리고 기술패권 경쟁시대에 존재가치를 유지하고 키우는 길은 바로 대체 불가한 첨단 기술에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5월 방한했을 때 가장 먼저 들른 곳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반도체·배터리 등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이런 첨단 기술 때문에 많은 국가에서 한국에 큰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우리나라 첨단 기술이 후발국들에 추월당할 때 우리에 대한 관심은 싸늘하게 식고 안보 위협도 커질 수 있다. 세계 최고 기술을 보유하기 위한 과학기술 혁신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과학기술 혁신을 위해서는 그동안 추구해 온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에서 벗어나 스스로 과학기술 혁신 모델을 선도해야 한다. 최근 민간의 연구비 투자는 정부 투자의 2.5배가 넘는다. 따라서 정부의 연구비 투자는 국가가 꼭 필요로 하는 전략적 분야 중심의 연구개발에 집중해야 한다.
지금까지 익숙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연구자들이 새로운 혁신을 시도할 수 있는 시스템 마련도 시급한 과제다. 관료들의 전문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하는데, 지금처럼 담당 업무를 1~2년만 맡고 보직을 자주 순환하는 관행으로는 전문적인 혁신이 어렵다. 향후 신설될 ‘우주항공청’이 전문직 공무원들로 구성될 것으로 알려져 성공이 기대된다.
과학기술 인력의 확보도 숙제다. 인구 절벽으로 국내의 가용 인적 자원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어 우려가 크다. 게다가 의대 쏠림 현상 때문에 학생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아 연구개발 인력 부족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초·중·고 교육이 입시 위주에서 탈피해 제대로 된 수학·과학(STEM)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이를 통해 과학기술에 대한 학생들의 소양과 관심이 대폭 높아져야 한다. 외국 인재 영입도 필수적이다.
과학기술 대중화 노력도 절실하다. 우리 첨단기술은 수준이 높지만, 국민의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낮다. 과학기술에 대한 무관심은 과학기술 분야에 진출하는 인적 자원을 고갈시킬 뿐 아니라 과학기술적 사실에 대한 불신으로 국력 낭비의 원인이 된다.
구글 창업자 에릭 슈밋은 지난 2월 한 기고문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예로 들며 미래 전쟁에서의 과학기술의 역할을 설파했다. 그는 앞으로 국가 안보는 물론 모든 면에서 과학기술 혁신 능력이 그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한국처럼 천연자원이 빈약하고 첨단 기술에 생존을 의지하는 나라는 과학기술 혁신만이 생존의 길임을 인식하고 혁신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우일 서울대 명예교수·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화상, 약 좀 바르지 마라” 명의가 꼽은 위험한 상식 | 중앙일보
- '강릉 급발진' 7억 소송…손자 잃은 할머니, 2가지 증거 내놨다 | 중앙일보
- "폰 도난당했다"…'사생활 폭로' 황의조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 중앙일보
- '울갤' 투신 방조했던 20대, 여중생과 성관계 "나이 알았다" | 중앙일보
- "4인 가족 제주 왕복 80만원" 항공편 늘려도 가격 오르는 이유 | 중앙일보
- '남편사망정식'에 엇갈린 시선..."나도 시켰다" vs "불쾌해" 말 나온 이유 | 중앙일보
- 33년간 평생항공권 쓴 남성…"술탄처럼 살았다" 진짜 혜택은 | 중앙일보
- 제브라피시 암컷 '은밀한 선택'…건강한 정자만 유혹하는 방법 | 중앙일보
- 北 6차례 방문한 40년 외교관…"영어보다 중요" 강조한 이것 | 중앙일보
- 푸틴 "무장반란 결국 실패할 운명"…5분 TV연설서 첫 언급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