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병건의 시선] 끊이지 않는 천안함 음모론
도대체 13년이 지났는데도 천안함 폭침을 거부하는 음모론은 왜 계속 살아나는 것일까. 잠잠해진 듯했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원인 불명”이라느니 “재조사를 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끊이지 않는다. 13년 전 미국·호주·영국·스웨덴 조사단원이 서명한 다국적 보고서가 나왔는데도 좌초설, 미군 잠수함 충돌설, 오폭설 등 다양한 ‘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이번엔, 결국 말을 물리긴 했지만, 더불어민주당에서 자폭설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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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년 지났어도 또 의혹 제기
민주당서 자폭설 다시 등장
폭침 인정할 땐 믿음에 상처
믿고 싶지 않으니 진실 거부
」
음모론(conspiracy theory), 또는 유언비어는 사회가 극히 불안해지거나,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지거나, 역병이 크게 도는 등 생존·안전에서 불확실성이 급증할 때 등장한다. 밤거리 치안이 불안해지면 ‘서울 ○○동 연쇄살인 괴담’ 식으로 퍼지는 경우가 그렇다. 미국에선 2014년 치명적인 에볼라 바이러스가 발생하면서 사회적으로 공황 상태에 빠졌는데 당시 ‘에볼라는 세계 인구를 줄이기 위해 펜타곤이 만들어낸 세균 무기’라는 허무맹랑한 괴담이 크게 번졌다. 또 당국이 의사소통을 막고 정보 유통을 차단하면 반작용으로 유언비어가 돌기도 한다. 정보에 대한 욕구는 커지는데 얻을 창구가 없으니 이를 유언비어가 대신한다. 통상 1년에 한두 차례씩 SNS로 퍼지는 ‘북한 급변설’이 이와 유사하다. 북한을 들여다볼 방법이 없어 진위 파악이 어려우니 순식간에 확산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는 사회적 공포와 정보의 통제 모두에 해당하지 않는다. 경제가 어렵지만 유언비어가 돌 만큼 공황을 겪는 건 아니다. 또 지난 정부 때 녹을 받았던 전직 외교기관장들이 방송과 유튜브에 나와 거리낌 없이 현 정부의 외교 정책과 순방 외교를 비난하는 시대다. 그러니 천안함 음모론이 왜 곰팡이처럼 피어오르는지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음모론을 정치적 소외의 틀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리처드 호프스태터). 기존 정치 시스템에선 자신들을 대변할 창구를 찾지 못하는 이들이 불만을 품고 음모론에 더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음모론까지는 아니지만, ‘평평 지구’가 이에 부합한다. 평면 지구를 주장하다 기존 과학 패러다임에선 완전히 무시당하자 더욱 고집스럽게 평면 지구를 믿는다.
그런데 천안함 음모론은 소외론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 때 천안함 재조사를 시도한 건 민주당과 진보 진영 내 마이너리티가 아니라 대통령 직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라는 공식 기구였으니, 정치적으로 소외된 이들이 천안함 음모론에 몰두한다는 가설과 잘 맞지 않는다.
천안함 음모론은 차라리 직관적으로 해석하는 게 더 설득력이 있다. 천안함 폭침을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좌초부터 자폭까지 각종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다. 천안함 폭침을 인정하는 순간, 내가 그동안 그려왔던 세계에 상처가 생긴다. 남북 긴장을 고조하고 갈등을 유발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을 타파해야 한다고 믿어왔는데, 천안함 폭침은 이런 믿음을 배신한다. 나를 바꿀 수 없으니 현실을 바꾸려 한다고 해석하는 게 더 그럴듯하다.
이런 점에서 천안함 음모론은 미국의 ‘버서’와 유사하다. 버서 음모론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미국이 아닌 케냐에서 태어났으니 대통령 후보 자격이 없고 따라서 당선도 무효라는 주장이다. ‘오바마의 출생(birth) 의혹’을 주장하는 이들이라서 ‘버서(birther)’라고 부른다. 이들은 오바마 측이 뭔가 대응을 할 때마다 집요하게 새로운 의혹을 만들어 냈다. 2008년 하와이 출생 증명서를 스캔해 공개했더니 포토샵 조작, 이른바 ‘포샵’ 의혹을 제기했다. 곧 1961년 8월 하와이 지역 신문에서 “미스터 앤 미시즈 버락 H 오바마, 아들, 8월 4일”(오바마 생일이 1961년 8월 4일)이라는 출생 안내가 발견됐지만, 이들 ‘버서’들은 출생지 허위 신고였을 가능성을 주장했다. 버서들이 케냐 출생설을 믿는 이유는 단순하다. 유색인종 대통령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백악관행이 결과적으론 트럼프 시대를 잉태해 미국의 균열을 가속했는지, 아니면 진행 중이던 균열을 늦췄는지의 평가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오바마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그의 집권 8년을 지워버릴 수 없다.
세상에 나만 존재할 경우엔 나의 인식을 바꾸면 세상도 바뀐다. 오직 나만이 존재하니 세상을 인식하는 나의 주관이 곧 객관이다. 하지만 타자와 공유하는 세상에선 내가 원하지 않는 현실을 거부한다고 해서 이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천안함 음모론자들은 진실은 받아들이지 않은 채 진실을 바꾸려고 싸우고 있다.
채병건 국제외교안보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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