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규의 글로벌 머니] 영국 경제의 수수께끼…물가가 안 잡히는 까닭은?
경제 역사가들이 근대 영국 경제를 이야기할 때 ‘성배(Holy Grail)’란 말을 자주 입에 올린다. 누구나 뛰어들어 연구하지만 좀체 답을 찾기 어려운 연구 대상이어서다. 런던정경대(LSE) 데빈 마 교수(경제사)는 “왜 산업혁명이 18세기 말 경제 대국인 프랑스가 아닌 섬나라 영국에서 시작됐는지가 여전히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이라며 “비슷한 난제가 영국의 대공황과 스태그플레이션, 경제위기 고통이 미국보다 더 심각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요즘 난제 하나가 더해질 조짐이다. 영국의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시장 전망치를 뛰어넘는 8.7%에 달했다. 물가 압력이 낮아지고 있는 미국과 유로존, 일본 등과는 딴판이다.
영국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하기 위해 변동성이 높은 에너지와 식료품, 술, 담배를 제외하고 만든 근원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한 해 전 같은 달과 견줘 7.1%나 됐다. 무엇보다 직전인 올해 4월 6.8%보다 더 높아졌다. 영국 정부가 내놓은 설명은 간명했다. “항공과 레저, 문화 상품, 중고차 가격(비용)이 5월 물가지수에 가장 큰 압력으로 작용했다”고 영국 통계청이 브리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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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CPI 8.7% 상승, 전망 초과
물가 안정세 미·일·EU와 차이
원인 놓고 분분, 갈등 양상까지
‘물가의 정치화’ 현상 재연 조짐
」
재발하는 영국의 고질병
영국 정부 설명은 건조하기 짝이 없다. 역사적인 맥락이나 정치적인 파장 등이 삭제돼 있다. 아니나 다를까. 5월 인플레이션 수치가 공개된 직후 영국 내부에서는 상당한 파장이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 진단과 코멘트가 이어진다.
이 가운데 관심을 끈 것은 프랑스 인시아드대 안토니오 파타스 교수(경제학)의 코멘트였다. 그는 서방 미디어와 인터뷰 그리고 기자와 통화에서 “영국의 고질병이 시차를 두고 재발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고질병은 영국이 스태그플레이션 등 경제 병리 현상을 유달리 심하게 앓는 패턴을 두고 한 말이다.
사실 우리의 눈에 고물가·저성장을 뜻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을 미국적인 현상으로 비친다. 하지만 영국 금융역사가인 글린 데이비스는 『돈의 역사(A History of Money)』에서 “미국의 물가가 뛸 때 영국은 치솟았다”고 평할 정도였다. 실제 인플레이션이 서방을 강타한 1973년 1차 오일쇼크 직후 미 물가 상승률은 최고치가 12% 정도였다. 반면에 영국 물가 상승률은 24% 수준까지 치솟았다. 여기에다 통화정책 오류까지 겹쳐 영국 경제는 위기에 빠졌다. 영란은행(BOE)이 물가를 잡기 위해 통화 공급량을 줄였다. 주로 시중은행의 대출을 억제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돈은 그 시절 은행 취급도 받지 못했던 주택조합(빌딩소사이어티)을 통해 뭉칫돈이 공급됐다. 그 바람에 기업 대출이 줄면서 실물경제는 침체에 빠졌다. 하지만 집값과 물가는 뛰는 일이 벌어졌다. 그 결과는 1976년 외환위기(Sterling Crisis)였다.
브렉시트 vs 탐욕
그해 위기의 원인이 밝혀진 것은 10여년이 흐른 뒤였다. 그 사이 영국 사회는 물가 급등의 원흉 찾기를 하면서 사회·정치적 갈등에 시달렸다. 재계는 노동조합 때문에 발생한 임금 경직성이 문제라고 했다. 반면에 노동계는 오일쇼크 등 대외 변수를 지목했다. 마거릿 대처 정부가 80년대 “영국병을 고친다”며 노동조합을 압박한 배경이다. 파타스 교수는 “인플레 원인은 따로 있는데, 물가가 정치화하는 바람에 원인 규명은 뒷전으로 밀렸다”고 말했다.
비슷한 갈등이 약 40년 만에 다시 불거질 조짐이다. BOE가 물가를 잡기 위해 이달 22일 기준금리를 5%까지 0.5%포인트 올렸다. 애초 예상은 0.25% 인상이었다. 하지만 물가 압력이 예상보다 커지자 큰 걸음(빅스텝)을 밟았다. 통화 긴축은 경제적 고통이 커지는 현상이다. 고통을 누가 더 감내해야 하는지를 두고 영국 내 갈등이 커지고 있다.
재계는 브렉시트(EU 탈퇴)가 낳은 임금 상승을 물가 원흉으로 지목한다. 그런데 최근 경제 데이터를 들여다보면, 브렉시트발 일손 부족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지는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BOE 앤드루 베일리 총재는 최근 통화정책 회의에서 “레스토랑 등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이 연 5% 남짓 올랐다”며 “하지만 더시티(런던 금융가) 사람들의 임금은 9% 정도 올랐다”고 발언했다. 브렉시트 때문에 일손이 부족한 레스토랑이나 배송 부문의 임금 인상은 물가 상승률을 밑돌았다는 얘기다.
물가의 정치화
영국 노동계와 시민단체 등은 새로운 말을 만들어 퍼뜨리고 있다. ‘탐욕 인플레이션(Greedflation)’이다. 기업 등 제품·서비스 공급자가 이윤율을 유지 또는 확대하기 위해 판매 가격을 올리는 바람에 인플레이션이 악화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애초 이 개념을 제시한 인물은 스위스계 금융그룹인 UBS의 글로벌웰스매니지먼트 폴 도노반 수석 이코노미스트였다. 그는 최근 기자와 인터뷰에서 “이윤추구를 탐욕(greed)이란 부정적인 말로 공격하진 않았다”며 “다만, 원유 등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고 있는 와중에도 물가가 오르는 현상을 살펴보니 공급자의 가격 인상이 발단이 된 이윤발 인플레이션(Profit-led Inflation)이었다”고 주장했다.
영국내 논쟁과 갈등이 어떻게 결말날지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프랑스 인시아드대 파타스 교수가 말한 ‘물가의 정치화’가 커질 가능성은 뚜렷하다. 인플레발 갈등이 커지면서 정부가 특정 기업이나 업종을 압박하는 현상이다. 최근엔 프랑스에서도 정부가 나서 기업의 판매가격 인하를 압박한다. 물가의 정치화는 먼 영국만의 일이 아닌 듯하다. 최근 한국 정부가 국제 밀가격 하락을 근거로 라면값 인하를 주문했다. 영국의 물가 정치화가 아주 빠르게 한국으로 전염되고 있는 듯하다.
강남규 국제경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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