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과거와 입시제도
과거시험이라고 하면 어떤 풍경이 떠오르나. 너른 궁궐 돌마당(조정)에 한 명씩 얌전히 줄 맞춰 앉아 정성스레 답지를 써내려가는 유생들 모습이 보통 생각날 거다. 사극에 흔히 나오는 장면이다.
현실은 물론 달랐다. ‘난장판’이란 단어 자체가 과거시험장 모습에서 유래했으니 말 다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가 그린 ‘봄날 새벽의 과거장(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에 그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커다란 양산이 여기저기 있고, 그 아래 여러 명이 한 팀으로 뭉쳐 답안지 작성에 여념이 없다. 응시자는 물론 글씨를 잘 쓰는 사수(寫手), 문장을 잘 짓는 거벽(巨擘), 자리와 물품을 지키는 수종(隨從) 등이 얽혀있다. 과거장 자체가 부정의 현장이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지금의 수학능력시험, 입사시험, 각종 고시를 합쳐놓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인구 600만~700만 명 시절인데 과거 응시자가 10만 명이 넘기도 했다. 그런데도 한 해 최종 합격자가 적게는 40~50명에 그쳤다. 양반 입장에선 관직 말고는 마땅한 직장이 없으니 부정을 저질러서라도 뚫어야 할 좁은 관문이었다.
그때도 선행학습이 있었고 사교육도 성행했다. 유학 서적을 꼼꼼히 익히기보다 시험에 나올 만한 문제를 골라 외우는 게 당연했다. 기출문제를 모아 놓은 과시, 모범답안을 정리한 초집,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사람의 답지 모음인 선려 등이 비밀리에 돌았다. 아예 담당 관리를 매수해 문제를 미리 빼내는 혁제란 부정행위도 있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박제가는 ‘과거론’에서 과거제도를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문제의 근원을 이렇게 짚었다. “모든 길을 다 막아놓고 오직 문 하나만 열어놨다. 한순간의 잘잘못으로 평생의 진퇴를 결정짓는다. 물이나 불 속에서 시험을 본다고 해도 대부분 그 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조선시대 과거제나 지금의 입시 구도나 다를 게 없다.
공교육에서 가르치지 않는 ‘킬러 문항’을 수능에서 빼라는 지난 15일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 이후 안 그래도 아수라장인 입시판이 더 시끄러워졌다. 고작 문제 몇 개 바꾼다고 달라질 난장판이 아니다. 입시 성적 한방으로 인생 경로가 판가름 나는 한국의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말이다.
조현숙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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