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인간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다

박길수 2023. 6. 26.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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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인류세의 철학' 통해 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문제

[박길수 기자]

후쿠시마 원전 핵 오염수 방류를 둘러싸고 일본보다 한국 사회에서의 갈등과 긴장이 더 고조되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원인이 된 동일본 대지진은 사실 우리가 '인류세'라고 하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많은 증거 중의 하나이다. 

시노하라 마사타케의 <인류세의 철학>(시노하라 마사타케 지음, 조성환 외 옮김, 모시는사람들 펴냄, 2022)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새삼스럽게 '인간 존재와 생존의 조건'을 탐구한 이야기이다. 필자는 이 책을 "인간은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읽었다. 그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 [인류세의 철학: 사변적 실재론 이후 '인간의 조건'  이 책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펼쳐진 폐허 위에서, 인간의 조건을 새삼스럽게 새로이 인식하는 과정을 담아 내며, '인류세'에서의 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 박길수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이 말은 영화 <부당거래>에서 양아치 같은 '주양 검사'(류승범 粉)가 내뱉는 대사다. 영화에서 주 검사는 경찰의 눈치를 살피는 검찰 수사관(공 수사관, 정만식 粉)을,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아!!"라고 찰지게 돌려까기 한다.  

물론, 주 검사의 경우는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을 악용하고 남용하고 오용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양아치 주' 검사의 오용 사례를 경계하는 것과 별개로, 인류 사회에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은, 매우 큰 문제다. 

인류세의 관점에서 보면, 실질적으로 인류 거의 전부가 그런 부류에 속한다. 인간은 오랫동안 인간이 누리는 자연(지구)의 호의를 인간의 당연한 권리라고 착각하며 살아왔다. 

자연의 호의를 인간의 권리로 알다   

오늘의 시기를 '인류세'라는 지질학적인 용어로 부르기 시작한 지 20년이 지나는 시점이다(2001년 네덜란드 화학자 파울 크뤼첸이 처음 제안했다). 학술적으로 용어를 공식화하기 위한 움직임도 최근에 시작되었다.

현재 공식 지질 시대 명칭인 '홀로세'가 시작된 것이 1만 년 전이므로, 현생인류는 '지질 시대'가 바뀌는 것을 '직관(直觀)'하는 최초의 인간-인류가 될 기회를 얻었다. 그 기회가 지옥으로 가는 열차를 탈 수 있는 티켓일 뿐이라는 점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아주 최근까지 인류는 '자연'이나 '지구'를 무한 에너지, 무한 원재료 공급처로 간주하며 살아왔다(아니, 사실은 꽤 오래전부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편의상, 그리고 이익을 위해 모른 척하고 내처 달려왔다. 그리고 그것을 '성장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호도해 왔다).

최근 들어 '인간중심주의'를 자성(自省)하는 흐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것을 '천부인권'이라 부르며, 인간이 누리는 자유, 소유, 향유의 권리는 신성불가침한 것이라고 구가(謳歌)해 왔다.

당대의 것뿐이 아니라 미래세대에게 베풀어질 호의까지도, 마구잡이로 가불해서 흥청망청 소비해 왔다. 경고가 날이 갈수록 높아져 왔지만, 폭탄 돌리기는 멈추지 않았다. 인간의 시간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거라고 믿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아니었다.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었다. 자연(지구)은 그동안 자신이 빌려준 것들의 목록을, 그 이자까지 차곡차곡 기록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돌려받는 방식을 아주 거친 것으로 예비해 놓고 있었다. 자비란 없다. 애초에 호의가 없었으니, 당연한 귀결이다. 

이제 '인류세'를 맞이하여, 인간은 그동안 누려온 것을 모두 토해내야 하는 시간이 '돌아왔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이 당대에 누린 몫뿐만이 아니라, 이미 죽어 땅속에 묻힌 사람들(최소 200년 전까지 소급해서)이 누리고 간 것까지, 모두 뱉어내야 한다(다른 한 가지 방법은, 그중 일부라도 상환을 미루는 것이다. 리볼링! 그리고 실제로 지금 인류는 그렇게 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지구'의 시간이다. 시시각각 다가드는 지구 차원의 불길한 예후들(기후재난과 코로나19 펜데믹 등)을 접하며 인류 대중은, 그동안 일부 선각자들이 소리 높여 외치던 바 "인간은 지구 전체의 만물과 세세히 연결된 존재다. 더불어 사는 길을 택하지 않으면, 파멸, 공멸, 전멸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점점 실감하며, 그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 '사변적 실재론 이후의 인간의 조건'이라는 부제가 붙은 <인류세의 철학>은 2011년 3월 11일의 동일본 대지진과 그로 말미암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펼쳐진, '인간 생존의 조건'이 파괴된 폐허지 위에는 무엇이 남게 되는지를 보면서 쓴 책이다.

저자는 대지진에 의해 여지 없이 파괴된 인간 삶의 조건(문명으로 구축한 시설물, 사회구조)들을 보면서, 인간이 '사물로서의 행성' 위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실감하였다고 고백한다.
 
인간 생활은 그것이 무언가를 하는 것과 활발하게 관련되는 것인 한, 언제나 다수의 인간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사물세계에 입각하고 있다. 인간생활은 이 세계를 떠나는 일도 없고 초월하는 일도 없다.

시노하라가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한 이 대목은 인간 삶이 사물(지구도 하나의 사물이다) 세계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이 지구의 호의라고 생각하며 남용한 지구의 자연 사물은 실은 인간 자신의 살과 같은 존재임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이 책은 지금 첨예한 문제가 되고 있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현장에서 들려주는 목소리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구로부터 날아드는 청구서
 
▲ 비인간, 인간을 넘어 인간으로 비인간 동물, 비인간 사물이 인간의 자리를 대신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인간은 이제, 겸손해져야 한다. (사진은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의 주제)
ⓒ 박길수
 
문제는 깨달음/회개보다 청구서가 먼저, 이미 들이닥쳤다는점이다. 그것이 이른바 '인류세 담론'이다. "빚쟁이가 몰려온다!"고 외치는 것이다! 시베리아(2019), 호주(2019-2020), 유럽(2021)에 이은 올해(2023) 캐나다의 대화재 그리고 그 어간의 중국과 유럽의 대홍수 등은 모두가 지구가 그동안 베푼 호의를 회수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올해와 내년에 걸친 '울트라 폭염' 등으로 청구서는 계속해서 날아들 것이다.  

그런 지경에,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라니! 인간은 자연(지구) 앞에서 겸허해져야 한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 그동안 갑질한 것에 대한 반성도 필요하다(물론 그렇다고 빚이 탕감되는 것은 아니다). 그 값은 치러야 한다. 지구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더불어사는 공생체(共生體)라는 걸 깨닫고, 거기에 갚하는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  

문제는, 아직도 대다수의 인간이, "지구가 베푸는 호의는 덫에 가까운 고리채"인 줄 모르고 여전히 흥청망청 소비하고 있다는 데 있다. 현대인은 그렇게 소비하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도록 길들여져 왔다.

혹은 이렇게 사는 게 정상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자기세뇌를 거듭한다. 이제,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끊을 때만큼의 고통스런 금단현상을 각오하고, '마약과도 같은 빚지는 인생-성장주의'를 끝장내야 한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문제는 그 첫단추다. 첫단추를 잘 끼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단추를 끼워 가야 하고, 그 단추의 크기도 점점 크질 것이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같은 건 애당초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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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필자의 블로그에도 일부 수정하여 공유합니다. - 이 글을 쓴 필자는 [인류세의 철학: 사변적 실재론 이후 '인간의 조건]을 발간한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의 대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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