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변호사도 속았다… 법정서 자신을 '부동산중개인'이라 한 중개보조원
서울시 종로구 한 빌라를 둘러싸고 임대차 소송을 하던 A씨(36)는 2심이 진행 중이던 2021년 6월경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다. 분쟁이 생긴 주택임대차 계약을 도운 C씨가 알고 보니 부동산중개인이 아닌 중개보조원이었던 것.
A씨는 자신의 빌라에 전세로 들어와 살려던 B씨와 2020년 5월부터 2년간 민사소송을 벌였다. A씨와 B씨는 당초 전세보증금을 중도금 없이 계약금과 잔금으로만 나눠 받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잔금 지급일을 앞두고 B씨가 사정이 생겼다며 "중도금을 주고 잔금은 나중에 지급하도록 해달라"고 A씨에게 요청하면서 갈등이 생겼다. A씨는 예정대로 잔금을 달라고 했고, B씨는 '상호 협의로 잔금일을 조정할 수 있다'고 한 임대차계약서상 특약을 A씨가 이행해주지 않는다고 맞서다 결국 법정까지 갔다.
C씨는 두 사람의 1심 재판에 증인으로 법정에 섰다. A씨는 그때까지도 그가 중개보조원인 걸 몰랐다. 임대차 계약이 조율되던 당시 C씨가 자신을 부동산중개법인의 이사로 소개해 당연히 자격증을 가진 부동산중개인으로 생각했다. 사건은 1, 2심을 거쳐 대법원 상고심까지 갔는데, 결국 A씨가 패소했다. C씨의 증언이 결정타가 됐다. 1심을 심리한 서부지법 제11민사부(부장판사 함석천)는 C씨가 중개보조원인 줄도 모르고 그의 증언을 바탕으로 판결했다. 판사가 깜빡 속은 것이다. C씨를 부동산중개인으로 알고 재판을 한 건 변호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지가 입수한 서부지법 1심 재판 녹취록에 따르면, B씨측 변호사가 C씨를 '부동산중개인'으로 칭하며 던지는 질문에 C씨는 모두 "네"라고 대답했다. "(부동산)중개인으로서 증인이 있었기 때문에 A씨, B씨 모두 증인을 통해서 의사를 전달했지요?"라고 묻자 "예"라고 대답한 것이 대표적이다. A씨측 변호사가 "증인은 부동산 공인중개인으로 언제부터 일했느냐"고 묻자 "현 부동산 사무실에서 2008년부터 10년 정도 됐다"고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이를 지켜본 판사도 재판 말미에 C씨를 사실상 부동산중개인으로 보고 계약 당시 상황 등에 관해 물었다.
중개보조원이 계약을 중개했다면, 이는 불법행위로 계약 자체가 성립될 수 있는지를 법정에서 따져봐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재판부마저 이 사실을 놓치면서 제대로 된 판결을 하지 못했다. A씨는 이 일로 C씨를 종로경찰서에 사기, 협박, 위증 혐의로 고발했다. 경찰은 조사 후 사건을 무혐의 의견으로 서부지검으로 송치했고 서부지검도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A씨는 서울고검에 검찰 수사가 잘못됐으니 다시 수사하게 해달라며 항고했지만, 이 역시 기각됐다. A씨는 지난 12일 검찰의 수사에 대해 법원에 재판단을 구하는 재정신청을 한 후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전세사기가 전국을 강타한 지난 2월 이후 일부 중개보조원의 불법 행위가 사고 원인으로 지목됐다. 부동산 중개 고의사고 중 중개보조원들에 의한 사고율은 2018년 57.1%, 2019년 62.7%, 2020년 67.4%로 꾸준히 늘고 있다는 한국공인중개사협회의 통계자료도 나와 국민들의 분노를 키웠다. 이런 흐름이 법조계로 이어진 분위기다. 중개보조원이 부동산 계약을 직접 또는 대리한 일로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법을 어긴 중개보조원에 대한 처벌도 벌금 수준에 그치고 있어 처벌 수위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해 8월 대구지법은 공인중개사 자격 없이 임대차계약을 직접 중개하고 수수료까지 받은 중개보조원에게 벌금 400만원을 선고했다.
중개보조원은 보통 부동산 중개사무소에서 일하는 사무원들이다. 공인된 자격증을 따야 하는 부동산중개인과 달리, 중개보조원은 누구든지 교육비 4만원을 내고 4시간 의무교육을 수료하면 할 수 있다. 업무는 현장 안내, 중개 업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반 사무 등으로 제한된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11월 중개보조원이 중개의뢰인과 직접 거래를 하거나 거래당사자 쌍방을 대리하는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한 공인중개사법 조항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에서 "해당 조항이 부동산 중개법인의 직업수행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신청인의 주장을 기각했다.
정부와 국회는 중개보조원의 업무를 제한하고 사고를 방지할 여러 방안을 내놓거나 검토하고 있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부동산중개사와 중개보조원을 현장에서 구분하기 어렵다는 지적에 따라 둘을 구분하는 명찰을 패용토록 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개보조원 고지를 의무화하고 채용인원을 개업공인중개사와 소속 공인중개사를 합한 수의 5배를 초과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공인중개사법 개정안이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해 오는 10월19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김형민 기자 khm193@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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