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우리 안의 파시즘
소통 수단이던 현수막은 사실
파시즘적 군사정권의 유물
그럼에도 21세기에 획일화된
정당 명의 현수막이 거리 곳곳
난무… 합리적 논쟁 포기하고
정쟁에 더 관심 갖는다는 증거
국회의원들은 이제 고함으로
승부하는 걸 걷어내길…선거철
확성기 소음도 없애야 할 유물
에드워드 올비의 1958년 희곡 ‘동물원 이야기’에는 포크와 세면도구, 빈 사진 프레임, 고장난 타자기가 소지품의 전부인 주인공 제리가 등장한다. 한때 유용했으나 이제는 낡은 유물이 된 웨스턴 유니언 타자기는 고장나 대문자만 찍힌다. 이 고장난 타자기는 거대 담론만 앞세우고 사회 구성원들의 작은 목소리는 반영되지도 않는 냉전시대, 기계적·일방적 소통만 존재하는 미국 사회에 대한 비판이자 이제는 한물간, 아까워도 버려야 할 것들에 대한 상징이다.
1998년 강사로 처음 맡은 수업이 ‘시사영어’라는 교양선택강좌였다. 다양한 전공의 학부생들이 듣는 수업이었는데 총학생회 학생들이 이 수업을 수강하다 보니 자연스레 교내 이런저런 사안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에는 나무와 나무 사이에 현수막을 거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스테이플러나 못으로 나무 몸통에 포스터를 붙이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백양로를 뒤덮은 현수막과 포스터들이 늘 거슬렸던 내가 현수막은 파시즘적 군사정권의 유물이고 환경에도 도움이 안 되니 자제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총학생회 소속 학생들이 손을 들더니 사안을 알리는 게 급선무이고 그 대의를 위해 나무에 거는 정도의 관행은 용인돼도 마땅하다는 반론을 폈다. 알림의 주요 수단으로 현수막을 대체할 만한 게 없다는 그들의 입장도 이해가 됐다.
8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학생회에서는 흰 천에 검은 잉크로 휘갈겨 쓴 현수막을 통해 자신들의 절박한 규탄을 이어갔으니 현수막이야말로 90년대까지 학생회의 특권이자 주요 소통 매체이기도 했다. 문제는 총학생회뿐만 아니라 동아리 모집, 공연 홍보, 교내 행사 등 온갖 알림이 포스터와 현수막으로 이뤄지고 있던 시절이었으니 현수막은 가히 대학 캠퍼스 문화의 당당한 일원이었다.
학생회의 알릴 권리도 중요하다면 학교가 정해준 자리에만 안전대를 이용해 현수막을 허용하는 방안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학생회는 정식으로 총무처에 현수막과 포스터 게시판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변화가 가시화되기까지 몇 학기가 걸리긴 했지만 2000년대 이래 우리 대학에서 현수막이나 포스터가 나무에 묶이거나 게시되는 일은 많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작년 12월 지자체 허가나 신고 없이 정당 명의의 현수막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는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각 정당의 현수막이 거리 곳곳에 내걸리고 있다. 대학 캠퍼스에도 졸업시즌이 되면 누군가의 졸업, 취업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내걸리고 있다. 이런 현수막들은 십중팔구 나무에 칭칭 동여매져 있다. 뿌리깊은 나무에 그 정도 현수막은 부담도 안 된다고 하시는 분께는 바람 많은 날 한 시간만 현수막 들고 서 계셔보길 권하고 싶다. 토양에 수분이 많은 우리 땅의 가로수들은 태풍에 쉽게 넘어질 수 있는데 현수막을 거는 것은 나무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다. 작년 한 해 동안 서울에서 수거된 불법 게시 현수막이 약 236t이라는데 이 중 43%만 재활용된다고 한다. 대부분 소각되는데 이때 온실가스와 1급 발암물질인 다이옥신 등이 배출된다고 하니 열심히 재활용하는 우리가 현수막은 소통의 수단이라 괜찮다고 허용하는 건 모순이다.
25년도 더 지난 21세기에 여전히 현수막이 난무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가 권위주의 정부, 군사정권 시절 정부 주도하의 모토와 구호가 담긴 획일화된 소통 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을 진입로, 동네 공원 입구, 횡단보도,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머물 공간에는 어김없이 현수막들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초록색의 나뭇잎과 그 사이로 보일 하늘과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가로수를 원한다. 선거철 대규모 홍보단들이 거리에서 내는 확성기 소음도 없어져야 할 유물이다. 이걸 규제해야 할 국회가 소통 목적으로 현수막 사용을 합법화했다는 것은 기본 업무에 충실하기보다 정쟁에 더 관심을 갖는다는 증거다. 비난과 공격, 혐오와 냉소가 담긴 국회의원들의 고함, 걷으시길 바란다. 국회 안에서 논리와 근거에 기반한 합리적 논쟁을 포기한 분들이 장외 투쟁을 하고 현수막을 내걸고 소리와 함성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가장 선진화된 사회는 정부의 역할이 모든 것에 공기처럼 스며 있으되 개인이 느끼는 국가의 존재가 가장 미미한 사회라고 한다. “올바른 목적에 이르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든 바르다”고 한 괴테의 말을 기억하자.
우미성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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