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진의 아트풀마인드] 도시를 살아있게 하는 법

2023. 6. 26.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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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진 문화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유럽의 수백 년 된 도시를 여행하다 우리는 왜 이런 공간이 없나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도시나 국가를 대표하는 관광명소가 된 오래된 장소들. 처음 봤을 땐 신기했고, 두 번째 볼 땐 이미 다 알아서 뻔하다고 느꼈지만, 세 번째 다시 보면 문화적 자산 가치가 새삼스럽게 확인되는 공간들. 상처를 잘 닦아내고 살아남은 궁전, 지금도 예배를 보는 웅장한 교회, 그리고 그곳을 가득 메운 가구·그림·조각·식물 등등. 찬찬히 들여다보면, 부러운 것은 그들의 공간이 아니라 그들이 공들인 시간이다.

이런 장소의 매력은 무엇보다 불가역적인 시간의 힘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전략은 분명하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차별적 가치를 만드는 것이다. 시간을 되감거나 빨리 감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장구한 시간을 쌓아 올린 공간의 힘을 대체하기란 불가능하다.

「 한국 근·현대사가 담긴 장소들
복합문화공간으로 잇단 변신
지자체들의 관심 또한 높아져
지역맞춤형 콘텐트 늘려가야

아트풀마인드

그렇다고 그냥 놔두기만 하면 안 된다. 백조가 물 아래로 쉼 없이 발짓을 하며 유유히 떠다니듯이, 표나지 않게 끊임없이 보수하고 유지 관리하는 비용이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본래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더 많은 사람의 관심과 방문을 유도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곳들이 시간 속에서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는다.

소위 문화 선진국들이 역사적 장소를 활용해서 문화적 자산으로 가치를 키워가는 방식은 다방면으로 진화해왔다. 독일의 노이에스 박물관은 2차 세계대전에 폭격으로 일부가 부서진 상태를 복구하는 방식을 두고 오랜 시간 진통을 겪었다.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마치 시간의 퍼즐을 맞추듯 19세기의 원형과 전쟁으로 생긴 총탄 자국을 그대로 두고 사라진 부분을 표나게 이어 붙이는 방법으로 새로운 시간을 더했다. 뮤지엄의 기능은 복원되었고, 시간의 나이테는 정직하게 쌓였다. 수많은 사례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화두는 역시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보존과 활용의 균형을 찾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나 6·25 전쟁을 겪으며 훼손된 건물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건립 100년 가까이 된 공간들은 근대문화유산이나 문화재 등으로 관리 대상에 오르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장소로서 인식되기엔 부족한 경우가 많다. 특히 일제강점기의 건축물은 부정적인 유산(negative heritage)이라는 낙인 때문에 세월 속에 봉인되기도 했다.

최근엔 산업화·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던 당시의 건축물을 도시재생 차원에서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사례가 두드러진다. 대전의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은 최근까지 철제구조물 판매창고로 쓰이다가 뜻을 품은 개인이 헤리디움이라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켰고, 충청북도는 도청 건물 중에 가장 먼저 지은 산업장려관을 새로 단장해서 지난달에 재개관했다.

충북 산업장려관(사진)은 충북도청 본관보다 6개월 앞선 1936년 12월에 문을 열었다. 최초엔 상공물산장려관으로 상품 전시 기능을 수행했던 이 건물은 이후 경찰청과 도청사무실·민원실 등으로 쓰였다. 도청의 관문이 되는 위치에 가장 먼저 생긴 건물이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의 발길이 닿았던 곳이지만 최근 10여년간 문서고로 사용하면서 앞뒤로 문을 닫았었다. 충청북도 김영환 도지사는 오래된 건물을 밀어내고 신청사를 건축하는 대신 새로운 방식의 활용을 독려했다. 문화유산을 단순히 복원하기보다 현명하게 개발하는 노력이 지역성을 넘어서는 가치를 만드는 초석이라는 비전을 실천한 것이다.

외양으론 서까래와 정교한 타일 바닥을 노출해서 복원하고, 사용 경험으론 복합적인 기능을 부여했다. 1층은 라이브방송, 특산물 전시, 카페가 있는 대화의 공간, 2층은 역사관과 현대미술전시관이 있는 쉼의 공간이다. 작가들은 충청북도의 역사와 문화적 자원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회화, 오디오 설치, 일러스트레이션 등 공간 맞춤형 작품을 설치했다.

이곳은 재개장 이후 이용객이 늘면서 수시로 북적인다고 한다. 새 산업장려관에서 도청은 행정 우수사례를 발표하거나 주요 도정에 대해 유연하게 브리핑을 하는가 하면, 동시에 대학생들이 졸업작품전을 열거나 지역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은 라이브 방송을 하기도 한다.

문화유산의 자산적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건물보다 중요하게 들여다봐야 할 것이 그 장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경험이다. 하나의 기능에 집중하는 대신 역사·문화·관광·예술 등의 다양한 콘텐트를 접목해서 경험의 조합을 설계해 나갈 때, 우리만의 자랑스러운 문화적 장소가 지속해서 늘어날 것이다.

신수진 문화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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