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권 폐지 후 ‘진통 1년’ 美 대선 최대 뇌관 부상…바이든도 쟁점화 나서[김형구의 USA 오디세이]
“1년 전 오늘 연방 대법원은 미국 국민의 헌법적 권리를 박탈하여 미 전역의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했습니다. 주 정부들이 시행 중인 낙태 금지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여성의 낙태를 합법화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연방 대법원이 공식 폐기한 지 1년을 맞은 24일(현지시간) 낸 성명에서 “판결이 뒤집히면서 파괴적인 결과가 초래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
「 24일로 낙태권 폐기 판결 1년
보수-진보 진영 찬반 대결 가열
바이든 측 “선거쟁점 될 것 분명”
공화당 대선후보 입장 온도차
」
그는 “공화당은 전국적 낙태 금지에서 더 나아가 식품의약국(FDA)이 승인한 임신 중절 약을 시장에서 퇴출시키려고 한다”고 비판한 뒤 “우리 행정부는 생식 건강 관리에 대한 접근권을 계속 보호하고 의회에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연방법으로 완전히 복원시킬 것을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연방 대법원이 지난해 6월 24일 임신 6개월 전까지 여성의 낙태를 허용했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하고 낙태 허용 여부를 각 주에 맡긴 지 1년째. 미국 사회는 극심한 진통을 앓고 있다. 미시시피·텍사스 주 등은 기존 낙태 전면 금지 법안을 발효시키거나 새로 법을 제정해 낙태를 금지하기 시작했다. 조지아·네브래스카·애리조나 주는 임신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지난 16일 기준 51개 주(워싱턴 DC 포함) 가운데 절반 정도인 25개 주가 낙태를 전면 또는 부분적으로 금지하고 있다(소송 등으로 법원이 효력을 정지한 상태인 5개 주 포함).
━
풍선효과 등 실효성 불투명…‘방패법’ 등장
하지만 낙태 금지 법안의 실효성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다. 많은 임신부들이 낙태가 합법적인 주로 이동해 시술을 받는 등 풍선효과가 나타나고 있어서다. 먹는 임신 중절 약 수요도 늘고 있다.
이에 낙태 반대 운동을 이끄는 보수 진영에서는 낙태 금지 법안의 강제력을 높이려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보수 성향 의료인 단체 ‘히포크라테스 의사 연합’은 지난해 11월 텍사스 법원에 임신 중절 약 미페프리스톤에 대한 FDA의 승인을 취소해달라며 소송을 내 연방 대법원 심리를 앞두고 있다.
그러자 진보 성향 지역을 중심으로 각종 ‘방패법’이 등장했다. 뉴욕 주의회는 이 지역 의료인이 낙태를 금지하는 주에 사는 여성에게 임신 중지 약을 처방하고 배송하더라도 이를 처벌할 수 없게 하는 법을 통과시켰고, 일리노이주는 지난 1월 낙태 시술을 받기 위해 다른 주에서 방문하는 여성을 보호하는 법안을 처리했다.
이렇듯 낙태 금지를 놓고 각 주마다, 그리고 보수-진보 진영 간 찬반 대결이 뜨거워지면서 이 이슈는 총기 규제, 이민법과 함께 미국 사회를 가르는 첨예한 어젠다가 됐다.
이날 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 1년을 맞아 미 전역은 찬반 집회로 들썩였다. 낙태권을 옹호하는 단체들은 워싱턴 DC에서 집회를 열고 내년 대선과 의회 선거에서 낙태권 반대 후보들을 심판하자는 주장을 폈다. 반면 낙태 금지를 외치는 시위대는 연방 대법원 앞에서 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 1년을 기념하는 축하 행사를 치르며 낙태 반대론을 폈다.
바이든, 대선 쟁점화로 여성 표심 공략
민주-공화 양당의 전쟁도 더욱 치열해지면서 낙태권 이슈는 내년 11월 대선 성패를 가를 핵심 뇌관으로 부상했다. 재선 도전을 선언한 바이든 대통령은 낙태 이슈를 재선 캠페인의 주요 의제로 끌고 가 여성과 젊은 층 표심 공략에 나설 거란 관측이 나온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바이든 대통령은 낙태권에 대한 지지를 선거 전략의 핵심으로 삼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바이든 대통령 참모진도 “낙태 금지 법안이 선거 쟁점이 될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여성의 낙태와 생식 건강 관리를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지침과 행정명령을 내놨는데 '공화당 대통령이 들어서면 이를 철회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도 이날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서 열린 낙태권 찬성 집회에 참석해 “연방 대법원이 박탈한 것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놔야 한다”며 힘을 보탰다.
공화당 “낙태 금지” 외치지만 대선 변수 우려
공화당은 “낙태 반대”를 외치며 보수 진영 결집을 시도하고 있다. 공화당 대선주자들은 거의 대부분 낙태 금지에 찬성하지만, 후보별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5월 “내가 임명한 (보수 성향) 대법관 덕분에 판결이 폐지됐다”고 자랑하면서도 재선 시 낙태를 금지하는 연방법에 서명할 것이냐는 물음에는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겠다”고만 했다.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와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은 좀 더 강경하다. 디샌티스 주지사는 낙태 금지 시기를 현행 임신 15주 이후에서 6주 이후로 앞당기는 주 법안에 서명했다. 펜스 부통령은 이날 워싱턴 DC에서 열린 낙태 반대 집회에 참석해 “생명의 신성함이 미국의 중심이 되도록 회복될 때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반면 공화당 내 유일한 여성 경선 후보인 니키 헤일리 전 유엔 대사는 지난 5월 낙태권 접근을 제한하는 ‘연방 정부의 역할’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임신 중 어느 시점에 금지돼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엔 답변을 거부했다.
공화당 저변에는 낙태 이슈가 내년 대선에서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공화당 대선후보들은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는 것이 최선의 대응책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11월 중간선거 때 ‘레드 웨이브’(공화당 압승)가 예상됐지만 사실상 패배한 요인 중 하나가 낙태권 반대 입장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또한 전통적으로 유권자 표심이 선거 때마다 달라지는 경합주에서 민주당에 석패한 주요 이유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지난해 11월 대표적인 스윙 스테이트로 꼽히는 미시간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를 상대로 낙승을 거둔 그레첸 휘트먼 민주당 후보는 선거운동 기간 내내 “낙태권 보호”를 외쳤었다. 당시 출구조사 결과 미시간주 유권자의 45%가 투표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이슈로 낙태권을 꼽은 점은 내년 대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워싱턴=김형구 특파원 kim.hyounggu@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두 아이 아빠, 위장이혼' 의혹 도연스님, 조계종에 환속 신청 | 중앙일보
- '사생활 폭로 파문' 황의조 측 "근거없는 루머, 강력 법적대응" | 중앙일보
- 살인자 정유정마저 '뽀샵질'…주작, 새로운 현실이 되다 | 중앙일보
- "지옥 갇혀 산 13년 세월"…살아남은 아이도 그림자가 됐다 [그림자 아이들①] | 중앙일보
- [단독] 27년전 유언장 '400억 싸움'…태광 이호진, 누나 이겼다 | 중앙일보
- 학원비로만 한 달에 100만원…먹고 사는 것보다 돈 더 쓴다 | 중앙일보
- '도적∙남자∙염소∙수탉'…푸틴에 칼 꽂은 바그너의 '4개 계급' | 중앙일보
- 英배우 샌즈 실종 지점서 5개월 만에 시신 발견…"신원 파악 중" | 중앙일보
- [단독]대치동 넘치자 '新학원가'로…서울 학원 수, 편의점 3배 | 중앙일보
- 3번 심장수술 의사도 만류했지만…기적적 득남, 그녀의 한마디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