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2035] 팔굽혀펴기로 대학을 간다면
대학 입시 기준이 팔굽혀펴기 횟수로 바뀐다면 어떻게 될까. 일단 서울 강남구 대치동을 시작으로 전국에 팔굽혀펴기 학원이 난립한다. 푸시업 일타강사는 매년 수백억원을 번다. 학부모는 줄지어 대기표를 뽑고, 자녀의 학원 반 배치 시험을 위해 과외 교사를 물색한다.
학원에선 팔꿈치 각도부터 근지구력을 키우기 위한 식단까지 가르쳐 줄 터다. 학원 강사인 지인과 농담처럼 주고받은 이야기다. 최근 학원가는 ‘준킬러 문항’ 대비 태세에 들어갔고, 대형학원 입시설명회엔 평소보다 더 많은 학부모가 참석한다는 걸 보면 우습기만 한 농담은 아니다.
대학생 때 3년간 아르바이트를 한 곳은 강남 대치동 학원이었다. 백화점은커녕 스타벅스도 없는 지역에서 나고 자라 20살 때 상경하다 보니 당시의 경험은 충격이었다. 중학교 1학년생이 수능 영어를 풀고, 일주일에 영어 단어를 300개씩 외웠다. 그냥 푸는 게 아니고, 만점을 목표로 풀었다. 300개 영어 단어 중 100개를 추려 시험을 봤는데 5개 이상 틀리는 건 용납되지 않았다.
당시 경험을 대치동 학부모한테 얘기했더니 “중학생이 영어를 푸는 걸 보면 최상위권반은 아니었나 보다”고 반응했다. 입시 영어는 초등학교 때 끝내는 게 트렌드란다. 그의 초등학생 둘째는 학원 숙제로 토플 문제를 들고 온다. 120점 만점에 110점을 넘겨야 학원 내에서 상위권으로 인정받는다.
어떤 전공, 어느 대학 출신이 개인의 평생을 결정한다. 입시는 인생 한 방의 수단, 로또다. 킬러 문항이 부추긴 측면도 있겠지만, ‘인생 로또’ 당첨 확률이 올라간다는데 사교육 수요가 줄어들 리 없다. 강태중 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은 2021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사교육의 연원은 수능 문항에 있는 게 아니라 수능 자체에 걸린 보상의 몫이 너무 크다는 데 있다”며 “스무 살 되기 전 수능에서 높은 점수를 얻으면 유효기간이 평생인 보상이 주어지는데 누군들 최대한으로 투자하지 않고 배기겠느냐”고 말했다.
커다란 보상이 불러일으킨 소모적 경쟁이 문제의 본질이다. 매년 45만 명(지난해 수능 응시자 수) 넘게 하나의 목표를 놓고 달려들다 보니 경쟁의 시작점이 점차 당겨졌다. 옆집이 고1 때 선행을 마쳤다면 우리 애는 중3 때, 그다음 사람은 중2 때. 그런 식으로 ‘초등학교 의대반’까지 나왔다. 초·중·고 12년의 사교육 비용 부담은 부모의 몫이다. 영어 유치원은 별도다. “고3 때 정신 차리고 코피 쏟으며 공부해 서울대에 갔다”는 이전 세대의 무용담은 전래동화 속 이야기가 됐다.
25일 오전 1시 30분. 세종시의 24시간 스터디 카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50석 규모 스터디 카페에 16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시간, 커다란 백팩을 메고 퇴실하는 이에게 물어보니 중학생이란다.
정진호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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