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유출, 순서 바꾸기가 대책? 교사는 헛웃음만 나온다
[서부원 기자]
▲ 제4세대 교육행정정보시스템(나이스) 첫 화면. 2023.6.23 |
ⓒ 나이스 |
전국의 모든 학교를 발칵 뒤집어놓을 만한 초대형 사건이 터졌다. 내용인즉슨, 지난 21일부터 새로이 개통된 4세대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아래 나이스)의 지필평가 항목의 문서 출력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해 다른 학교, 다른 교과의 '문항 정보표'가 출력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시스템의 오류는 특정 지역에 한정된 문제일 수 없어서, 교육부는 서둘러 긴급 공문을 전국의 학교에 하달했다.
문항 정보표란 지필평가와 관련해 출제 내용과 성취기준, 문항별 난이도, 배점, 정답 등을 기록한 문서를 일컫는다. 출제 원안의 핵심 정보를 모두 담고 있어 입력 과정에서도 오로지 출제 교사만 접근하게 돼 있다. 보안이 생명인 문항 정보표가 학교 울타리 밖으로 유출됐다면, 출제 원안이 통째로 공개된 거나 마찬가지다.
긴급 공문에 적시된 교육부의 조치 요구사항은 엉성하기 짝이 없다. 부디 아무 일 없길 바라는 간절한 바람만 담겼을 뿐,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대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장 시험을 치르는 학교는 그대로 시험을 진행하고, 26일 월요일 이후에 시험을 치르는 학교는 교과별로 답지 및 문항 순서를 변경한 후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문항 순서를 바꾼다고 해결될까
느닷없는 긴급 공문에 놀란 교사들은 퇴근하다 말고 출제 원안을 수정하느라 진땀을 뺐다. 학년과 교과 상관없이 모두 교무실 노트북 앞에 앉아 지시대로 문항 순서를 바꾸고, 다섯 개의 선지 순서를 조정하느라 분주했다. 공문이 하달될 때부터 나이스는 먹통이 돼, 종일 문항 정보표의 수정은커녕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이어졌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이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평가가 치러지고 아무 일 없이 마무리되면 다행이지만, 이번 사안과 관련된 조그만 민원이라도 발생하면 낭패다. 워낙 폭발력이 큰 내신 성적과 관련된 사안이라 수습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시험 일정을 늦추고 전면 재출제하도록 일괄 조치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교육부의 상황 인식은 안이하기 짝이 없다. 오류 건수가 미미한 데다 수도권 지역 일부 학교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긴급 공문의 호들갑스러움과는 달리 대수롭지 않다는 투다. 심지어 "문항 정보표가 유출됐지만, 시험 문제 자체가 유출된 것이 아닌 만큼 시험 문제의 순서를 바꾸면 공정성과 관련된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본다"는 황당한 답변을 늘어놓았다.
문항 정보표에 어떤 시험 정보가 담겨 있는지 몰라서 하는 말일까. 설마 그러랴 싶지만, 학교 현장의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와 전혀 딴판이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문항 정보표에는 출제한 내용이 적시돼 있어서 문항의 순서만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아예 정답을 문항 정보표의 내용 영역에 써넣은 교과와 교사도 드물지 않다.
어처구니없는 해명을 한 교육부 관계자와 문항 정보표 유출의 위험성을 간과하는 장삼이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면 이러하다. 다음과 같은 문항을 출제했다고 치자. 이 문항에서 다루는 주제는 단원의 학습 목표에 제시된 중요한 내용으로, 실제로 모의평가는 물론 수능에서도 자주 출제되는 단골 문항이다.
문항. 아래 제시된 세 가지 사료와 관련된 탐구 주제로 가장 적절한 것은?
(1)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조세 부담을 공평하게 하였다.
(2) 지역 양반들의 근거지였던 전국 600여 개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3) 부족한 궁궐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원납전을 징수하고 당백전을 발행하였다.
① 개화 정책에 대한 반발 ② 근대적 갑오개혁의 추진 ③ 서구열강의 침입에 대한 대응
④ 광무개혁의 세부 내용 ⑤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치
해당 문항에 대한 문항 정보표의 내용 영역에 출제 교사는 당연히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치'라고 적는다. 그것이 출제 내용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이 '정답'이라는 거다. 문항 번호와 다섯 개의 선지를 바꾼다고 해서 정답이 바뀔 리 없다. 만약 해당 문항 정보표가 유출됐다면, 시험 문항을 통째로 다시 출제해야 하는 게 맞다.
오죽하면, 한국사 교사들 사이에서 앞으로는 문항 정보표의 내용 영역에 구체적인 내용을 적지 말고, 그냥 '전근대사', '근현대사'라고만 써넣자는 조롱이 터져 나오겠는가. "문항 정보표 유출이 시험 문제 유출과는 별개"라는 교육부의 해명은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라는 말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면피에 급급한 그들의 치졸한 행태에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 이주호 교육부총리(자료사진) |
ⓒ 권우성 |
교사들이 분개하는 건, 학기 말이라는 이 바쁜 와중에 시험 문제를 다시 손봐야 하는 번거로움만은 아니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교사들에게 학기 말은 눈코 뜰 새가 없는 시간이다. 수행평가도 마무리해야 하고, 생활기록부도 입력해야 하고, 출결 상황도 정리해야 하고, 기말고사 후 성적도 합산해야 하고, 방학 계획도 수립해야 하는 등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사고는 교육부가 쳐놓고 왜 뒤처리는 늘 일선 교사의 몫이죠? 교육부는 긴급 공문 한 장 달랑 내려보내면 끝인가요?"
교사들의 분노는 책임은 지지 않고 권한만 누리려는 교육부의 관성적 행태를 향하고 있다. 불과 이틀 전,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질문과 토론 수업의 필요성 운운하며 학교 문화 개선을 부르댔지만, 정작 이번 사달에는 일언반구조차 없다.
전교조와 지역 교사노조, 실천교육교사모임 등 교원단체마다 발표하는 긴급 성명의 내용, 일선 현장 교사들의 토로를 교육부가 제발 진지하게 받아들이길 바란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직 고교 교사입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낸 큰 아들..."기둥 뿌리가 사라졌어요"
- 사과도 때가 있다... 검찰, 바로 지금이다
- 이틀간 나온 7.5톤 쓰레기 차량에 깜짝... '제로서울'의 민낯
- 한국인이라면 한 번은 꼭 가 봐야 하는 섬
- "오늘은 사랑한다"는 여자, 이 괴상한 연애의 시작
- 하와이 땡볕 10시간 일해 번 달러, 독립자금으로 내놓은 사람들
- 대형사고 터진 날, 학교에 떠돈 7행시
- 푸틴 "무장반란, 등에 칼 꽂는 반역... 가혹하게 대응할 것"
- 장마 코앞인데, 204억 침수예방시설에 균열... 부실공사 논란
- 근현대사 연구 '대표적 진보 역사학자' 강만길 교수 별세